노래방에 갔다. 별거 아닌 이 한마디가 마치 고해성사하듯 부담이 될 줄은 전엔 미처 몰랐다. 일탈이 즐거웠던 만큼 이후 찾아온 ‘현자타임(욕구 충족 후 찾아오는 허무함의 시간)’도 거셌다. 그간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실천해 왔다지만 언론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 해왔던 말들이 무색해진 멋쩍음. 그래도 조금은 숨통이 트여 살 것 같고, 동시에 죄스러웠다.
한동안 노래방에 못 갔었다.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된 이후 노래방 역시 감염의 온상 중 하나로 지목됐다. 혼자 스트레스를 풀기에 더할 나위 없던 코인노래방은 지난달 무기한 집합금지 명령으로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회식도 사라지고, 다중모임도 자제를 권면 받은 상황에서 평소 직장인 밴드라도 하지 않았던 ‘노래인(人)’들은 갈 곳을 잃었다.
박탈감이 컸다. 아파트 주민인지라 집에서 큰 소리 내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자신만의 성채’인 차 속에서 흥얼거려 봐도 사고라도 날까 움츠러들어 턱없이 흥이 모자랐다. 축가 준비 때나 이용하던 연습실을 대여해 봤지만 번거롭고, 부담스러웠다.
코로나 이후 대다수 국민은 취미생활 혹은 물리적·정서적 교류를 상당 부분 제한당해 왔다. 축구·농구 등 구기 종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동호회 한번 맘 편하게 나가기 어려워졌고, 헬스장을 밥 먹듯 드나들던 주변 운동중독자들도 팔자에 없던 홈트레이닝에 답답함을 호소했다. 술과 모임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온 직장인이라면 ‘혼술’ ‘집술’에 익숙해져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 종교에서 안정을 찾던 사람들은 몇 달째 현장 전례 대신 온라인예배 등으로 목마름을 해갈해야만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초기엔 동선 제한에 대한 답답함과의 싸움이 힘겨웠다면, 집중 방역 효과로 확진자가 ‘0’에 수렴했다가 재확산한 후에는 정상화에 대한 희망고문이 우리를 지치게 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꾸준히 수십 명의 추가 확진이 일상화된 요즘은 일상 속 결핍과 죄의식이 헷갈림의 주체가 됐다. 당연시됐던 일상, 잃어버린 과거로 회귀하고픈 관성과 ‘이 시국에 벌써 이래도 되나’하는 부담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번민하고 있다.
솔직히 많은 부분에서 우리 사회는 코로나 이전의 모습으로 ‘이미’ 되돌아와 있는 모양새다. 흔들리는 생활 방역 속에서도 ‘등교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정부는 개학을 강행했다. 재택근무가 ‘뉴노멀(New Normal)’이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많은 회사는 조용히 직원들을 원대복귀시켰다. 재난의 실체적 상징이었던 확진자 수는 이제 위압감이 배제된 일종의 통계수치로 인식되며 다수의 뇌리에서 무덤덤해졌다.
이에 정부는 12일 강화된 수도권 방역관리 체계를 사실상 무기한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분석 결과 방역 강화에도 불구하고 5월 마지막 주말 대비 6월 첫 주말 주민 이동량이 3% 감소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주말 내내 주요 도심지는 북새통을 이뤘고, 제주와 강원도 등 주요 휴가지 예약은 꽉꽉 들어찼다. 수치상으로도 큰 폭의 변화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선 ‘계속되는 통제에 국민이 지치고, 무감각해졌다는 방증’으로 분석한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갈 경우 생업 피해 등이 예상된다”며 “이를 최소화하고 감염의 고리를 찾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번 조치의 의의를 한정했다. 전문가들은 2차 대유행만큼이나 코로나 상시화·장기화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리적 결핍의 산물로서 죄의식 또한 기약 없이 강요돼선 안 된다. 추가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한마음 한뜻으로 각자의 ‘자제’가 미덕인 지금이지만, 일상행위가 악덕(惡德)인지를 매 순간 고민해야 한다면 사회가 그 피로도를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가혹한 주문일지 몰라도 정부가 방역 강화만큼이나 국민의 정서 건강을 위한 뉴노멀도 고민해주길 바란다.
정건희 미션영상부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