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2월 27일 토요일 오후 4시 이화여대 후문 레스토랑에서 한 자매를 만났다. 아담한 키에 인상이 참하고 푸근한 아가씨였다. 7남매 중 넷째로 가정에서 혼자만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더 특별했던 점은 그 자매가 연세대 출신 직장인이었다는 점이다.
‘생명의 삶’ 편집장으로 일할 당시 두란노서원 사무실은 연세대 맞은편에 있었다. 점심시간에 연세대 뒷산으로 산책하러 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여유롭게 대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부러웠고 막연하게 이 학교 출신 자매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또 하나는 배우자가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 싶었다. 솔직히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먼 목회자로 살아가며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소개받은 자매가 그동안 기도했던 배우자상과 꼭 맞는다는 사실에 제법 놀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 자매가 툭 하고 고백을 했다.
“전 연애할 사람이 아니라 결혼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매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너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물음에 ‘주님의 도구가 되는 일’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곤 내가 월요일 낮 12시까지 전화를 해서 다시 만나자고 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정녕 인도하심이었을까. 나는 운명처럼 월요일 오전 11시 59분에 아내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고 그로부터 75일이 지난 후 자매는 지금의 내 아내가 됐다.
그러나 결혼은 우리 두 사람만 좋다고 성사될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집은 가난한 피난민 집안이었던 반면, 아내는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아버지에 형제자매 모두 대학을 나온 집안이었다. 아내의 집에서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나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아내 집안에선 일절 관심도 없는 목사 후보생 신분이었다.
아내 집에서는 어떻게든 나와 떼어놓을 심산으로 아내에게 유학을 종용했다. 그러나 아내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눈물로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루는 아내의 둘째 오빠가 집안의 특사 자격으로 나와 아내를 만나러 나왔다. 이 결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통보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결국 특사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아내와 나의 간곡한 설득에 오빠는 결혼에 동의해줬고 우리를 대신해 가족을 설득해 주기까지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의 온누리교회 서빙고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가건물에서 결혼했다. 하용조 목사님이 친히 주례를 맡아주셨다. 아내는 과거 목사님이 인도하던 성경공부반에서 성경을 배우던 당시부터 하 목사님을 존경해왔다. 그런 하 목사님이 주례를 해주신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온누리교회 가건물에서 올린 첫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예배였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