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도 온몸을 다 덮은 긴소매·긴바지. 손과 발엔 누군가가 지진 듯한 화상….
왜소하기 그지없는 아홉살 소녀가 10m 높이의 4층 빌라 난간을 넘고 있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 아이는 사이벽을 간신히 넘어 옆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옆집 현관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와 무작정 길거리를 걸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 걸음걸이도 불안했다. 행인이 소녀를 세웠다. 소녀는 “너무 배가 고파요”라고 했다. 행인은 편의점으로 데려가 먹을 걸 사줬다. 허겁지겁 먹는 소녀의 처참한 모습에서 행인도, 편의점 직원도 눈을 떼지 못했다. 행인은 소녀를 차에 태워 곧장 가까운 경찰서로 달려갔다.
지난달 29일 경남 창녕의 한 빌라에서 탈출한 A양의 이야기다. 온갖 사랑을 받아도 모자랄 나이의 소녀가 필사적으로 벗어난 곳은 부모와 함께 살던 자신의 집이었다.
경남경찰청은 11일 A양이 친어머니와 의붓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와 아동보호기관에서의 진술을 낱낱이 공개했다.
경찰에 따르면 A양은 경찰 신고가 접수되기 이틀 전부터 이 빌라 베란다에 갇혀 있었다. 감금된 개처럼 쇠사슬로 된 목줄을 찼으며, 쇠사슬은 철제 난간에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부모는 소녀에게 하루 한 끼의 밥밖에 주지 않았다. 밥을 먹거나 설겆이 등 집안일을 시킬 때만 목줄을 풀어줬다.
탈출한 바로 그때는 부모가 A양의 목줄을 무슨 이유에선가 풀어준 시간이었다. 친엄마는 3명의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의붓아버지는 일하러 외출한 상태였다. A양은 빌라를 벗어나 큰 길가로 뛰어가다 탈진 상태에서 행인에게 발견됐다. 눈가는 심하게 멍이 들고, 손가락과 발등엔 물집 잡힌 화상, 머리엔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A양은 아동보호기관에서 복층 구조인 다락방에 혼자 지냈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온갖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물이 담긴 욕조에 온몸을 가둬 숨을 못 쉬게 하거나 쇠막대기로 멍이 들 만큼 온몸을 때렸다고도 했다. 친엄마는 뜨거운 접착제가 든 글루건을 A양의 발등에 쏘기도 했다. 위탁가정에 강제로 맡겨졌다가 2017년부터 함께 살게 된 소녀는 2년여 동안 부모로부터 갖은 만행을 당해왔다고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집에서 나갈거야”라고 울부짖으면 차가운 베란다로 쫓겨나 자물쇠가 달린 쇠사슬에 묶인 채 며칠씩 방치됐다는 말도 했다.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A양은 부모에 의해 철저하게 감금된 생활을 해온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런 야만적인 학대 사실은 부모가 일부러 입힌 긴 옷에 상처가 가려져 초등학교 담임교사도, 이웃도 몰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친엄마는 의붓아버지와의 사이에 낳은 세 동생에겐 전혀 폭행을 가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전했다. 심지어 셋째 동생을 임신하자 조현병을 앓던 엄마는 치료약을 딱 끊은 사실도 드러났다. 치료약 때문에 태어날 아기가 잘못되지 않을까 염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A양 상습학대 사실이 밝혀져 법원에 의해 친자식 3명도 아동보호기관에 강제 위탁되자 “불공평하다”며 벽에 머리를 찧고, 4층 빌라 아래로 투신하려는 자해 시도를 하기까지 했다.
친자식을 극진히 보살피면서도 그들은 A양에겐 증오와 폭력, 야만의 시간만을 허락했다. A양 손가락의 화상은 의붓아버지가 프라이팬에 지진 것으로 밝혀졌다. 만약 A양이 도망가더라도 지문을 없애 신원을 알 수 없게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A양을 두 차례 조사하고 아동보호기관 상담 기록을 검토해 집안을 압수수색했다”며 “아동 본인이 밝힌 폭행과 학대 사실이 대부분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도 A양 손가락을 지진 사실은 인정했다”면서 “부모에 대한 피의자 조사를 통해 상습 아동학대 혐의를 추가 조사할 것”이라고 했다.
병원 검진 결과 A양은 몸 여러 곳에서 뼈가 부러진 골절과 상처, 화상 등이 발견됐다.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해 심한 빈혈을 앓고 있었다.
“집에 다신 안 갈 거예요.” A양은 아동보호기관에서 이 말과 함께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맞아서 다치거나 멍이 들면 소녀의 부모는 보이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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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이영재 기자 yj311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