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본립도생

입력 2020-06-12 04:03

한(恨)은 서린다. 폭정 가난 약탈 침략 전쟁 억압 상실 등을 겪으면서 마음 깊이 자리 잡는다. 고통으로 내지르는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래서 쌓일 대로 쌓여 목젖까지 차오른 한을 풀겠다고 없는 힘을 끌어모아 들고 일어나도 잠시뿐. 고단한 세상살이는 되풀이된다. 원(怨)이라면 앙갚음으로 해소할 수 있을 텐데 한은 그렇지 않다.

국민소득 1인당 3만 달러, 2019년 명목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민주주의 성숙도 세계 23위.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할 순 없지만 여러 지표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안팎을 차지하는 강국이다. 예전 같은 폭정이나 약탈, 억압은 없고 절대빈곤에서도 대부분 벗어났는데 사람들에겐 여전히 한이 보인다. 유전자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것일까.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보건사회연구소, 행복연구소가 지난해 공동 주최한 학술포럼의 주제는 ‘한국의 울분’이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가 이 자리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2019년 조사 3건, 2018년 조사 2건을 종합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지속적 울분’을 느끼는 사람은 32.8%, ‘심한 울분’을 느끼는 사람은 10.7%였다. 한국인의 43.5%가 만성적으로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울분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나 상황은 ‘감정에 상처를 주는’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일이 일관되게 포함됐다고 한다. 개인·기업의 지배적 지위를 이용한 갑질, 직장·학교 등 가까운 일상에서 벌어진 차별과 따돌림, 공권력 남용, 안전관리 부실로 인한 참사 등이 울분을 일으키는 정치·사회 사안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젊을수록, 저소득층일수록, 주당 근로시간이 짧을수록 울분 수준이 높았다.

포럼에 초청된 미하엘 린덴 독일 샤리테대학 교수는 울분을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 분노가 생기고, 복수심이 들지만 반격할 여지가 없어 무기력해지고, 뭔가 달라지리라는 희망도 없는 상태에 굴욕감이 결합되면서 생기는, 분노보다 더 복합적인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일하고 싶은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열심히 일해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언제든 ‘잘릴’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누구는 어떤 자리나 돈을 갖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위를 이용해 온갖 횡포를 부리고, 혈연 지연 학연으로 끌어주고, 내 편이냐 아니냐 또는 돈이나 지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대면서 ‘걸려도’ 다 빠져나간다. 우리에게, 좋은 일에 쓰일 것이라며 군말 없이 세금 내고 기부하는데 관리는 엉망이다. 이상하게 법은 ‘진짜 나쁜 놈’에게 관대하다. 한과 울분이 안 생기면 이상한 일 아닌가. 도대체 바뀌지 않는 사회를 보면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장총찬이 이 시대에 실제로 활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마하트마 간디는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품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를 7가지 사회악이라고 규정했다. 1925년 인도의 주간지 영인디아에 실렸다는데 벌써 한 세기 가까이 지났다. 굳이 실례를 들지 않아도 달라진 게 없다. 모두, 100% 동의하는 원칙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더라도 엄격하게 실행된다면 사람들은 수긍한다. 융통성을 발휘하더라도 공정하다면 받아들인다. 스스로 한과 울분을 다스린다. 원칙을 지키려고, 원칙을 지키자며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았다. 그 눈물과 땀과 피 위에 우리가 서 있다. 다시 원칙과 공정을 생각할 때다. 본립도생(本立道生). 논어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로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전재우 사회2부 부장 jw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