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시절, 한 달에 10만∼20만원 하는 교육전도사 사례비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됐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에 두란노서원에서 성경 묵상집 ‘생명의 삶’ 편집장을 뽑는다는 걸 알게 됐다.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갔더니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이 계셨다. 하 목사님은 면접을 마치고 작은 영어책을 하나 주며 번역을 해보라고 하셨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진 못했지만, 정성껏 책을 번역했다. 결과물이 맘에 드셨던지 하 목사님은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생명의 삶’ 편집장으로 두란노서원에서 만 5년간 일했다. 신대원생이 월간지 편집장을 맡은 건 당시로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내가 일을 시작할 무렵 2만부가량 발행되던 ‘생명의 삶’은 꾸준히 부수가 늘어나 5년 후에는 10만부가 됐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편집장 직함은 목사 안수를 받고 청와대 앞 옥인교회 부목사로 부임하면서 내려놨다. 부목사로 전임 사역을 하면서 다른 파트타임 업무를 할 심적 여유나 시간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옥인교회 김영철 목사님의 사랑이 컸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옥인교회를 섬기고 싶었다.
부목사 면접을 치를 당시 우리 식구는 나와 만삭인 아내, 부모님 이렇게 네 식구였다. 당시 옥인교회 부목사 사택은 청운동 13평 아파트로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다. 김 목사님과 면접을 치르는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김 목사님은 잠시 고민하시곤 당회에서 논의해 보겠다고 하셨다.
일주일 후 연락이 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게 교회 근처에 25평짜리 전셋집을 마련해주겠네.” 얼마든지 다른 부목사를 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파격에 가까운 배려를 해주신 것이다. 그렇게 옥인교회를 섬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교회신문을 만들려고 하는데 출판 경력자인 내가 부목사로 와서 그 일을 맡아줬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왕성교회는 뜨겁게 부흥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나는 길 목사님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흥하는 교회에서 문서선교사로 경력을 쌓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옥인교회 김 목사님의 배려를 생각할 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길 목사님께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교회를 옮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길 목사님은 간곡히 다시 요청하셨다. 부목사 사역이 힘들면 월요일에 파트타임이라도 괜찮으니 도와달라고 하셨다. 길 목사님의 요청이 하도 간곡해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기도 끝에 김 목사님을 뵙고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김 목사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생각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김 목사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곤, “도와줄 수 있으면 돕는 게 좋겠다”며 너그럽게 허락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3년 동안 월요일마다 파트타임으로 왕성교회 교회신문 만드는 일을 했다. 왕성교회 신문은 전도용으로 많이 이용됐고 매주 5만부를 찍어낼 만큼 호응을 얻었다. 그렇게 두 분 어르신 목사님들의 배려와 인도로 나는 문서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금 옥수중앙교회가 발간하는 월간 소식지 ‘옥수중앙뉴스’도 35년 전 시작된 내 문서선교 사역의 연장이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