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삐라

입력 2020-06-12 04:05

1970년대 시골 산기슭에 있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삐라’에 대한 추억이 많다. 반공 교육이 철저했던 당시 학교 선생님들은 삐라를 발견하면 즉시 경찰지서(警察支署)에 신고하라고 입이 닳도록 주입했다. 삐라는 유독 빨간 글씨와 그림이 많아 눈에 잘 띄었다. 주로 북한 경제력을 과시하거나 박정희 독재정권 등 남한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칡을 캐러 산을 갈 때 특히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 즉시 지서를 찾아가 삐라를 건네고 발견장소를 신고했다. 칭찬과 함께 학용품을 보상으로 받곤 했다. 당시 북한 삐라는 시골 야산 등에 주로 뿌려졌지만, 서울 등 도심 외곽에서도 종종 발견됐을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살포됐다.

삐라는 국어대사전에 전단(傳單)의 북한어라고 풀이돼 있다. 남북한 삐라의 역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유엔군과 북한군이 심리적 목적으로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휴전 이후에는 줄곧 남북 모두 체제를 선전하고 상대를 이간시키며, 월남과 월북을 권유하는 내용 등이 많았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삐라는 탈북 단체 등 민간이 주도했다.

최근 삐라 살포 논란으로 남북관계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북한은 남북 간 모든 통신선을 차단하고 “남북관계 총파산” “악몽 같은 시간 될 것” 등 운운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남북이 2018년 판문점선언을 통해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기로 한 것을 이유로 든다. 탈북 단체는 지난달 31일 경기도 김포에서 북한에 삐라 50만장을 풍선에 띄워 보낸 데 이어 오는 25일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또다시 전단 100만장을 뿌린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의 대응은 과하다. 그동안 남북 간에 얼마나 많은 삐라들이 뿌려졌나. 상대 최고위층을 겨냥한 온갖 비난과 막말이 오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든 체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북한이 과잉 반응하는 것을 보면 국제사회의 오랜 대북제재와 코로나19에 따른 경제난 등이 겹쳐 체제 유지에 자신감이 떨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종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