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오늘은 뭐 입지

입력 2020-06-12 04:03

출근 전 바쁜 아침시간에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일은, 출근 이후 맞닥뜨리는 ‘점심에 무얼 먹을까’만큼이나 중요한 의사결정이다. 그날의 일정과 만나게 될 사람들을 떠올리고, 날씨를 고려하며 신중을 기한다. 옷장엔 옷이 가득하지만 각기 다른 날들에 저마다의 이유로 산 옷들이 마침 오늘 나의 몸 위에서 조화를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거울 앞에서 갈팡질팡 방황하는 날에는 검정 터틀넥과 청바지를 고수하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든 스티브 잡스가 부럽다.

대중의 관심 속에 사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에게 패션은 특히 중요하다. 옷 잘 입는 정치인으로 유명한 유럽중앙은행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기본적으로 우아한 차림에 화려한 스카프나 가방 등으로 포인트를 준다. 전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는 화려하고 과감한 패션으로 당당함을 드러냈다. 미국 최연소 하원의원이 되며 주목받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여성 참정권운동가들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취임식에서 흰색 정장을 입었다. 옷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슈퍼스타의 스타일리스트가 운영한다는 유튜브 채널 ‘슈스스tv’는 구독자가 85만명이 넘는다. 10, 20대가 많아서인지 그녀는 구독자를 ‘베이비’라 부르며 친절히 패션의 세계로 안내한다. 거기선 옷이 그냥 옷이 아니다. 분위기는 룩(look), 옷과 액세서리는 아이템(item), 옷 입기는 스타일링(styling)이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베이비들~ 나 오늘 룩 어때? 전문직 여성 같지 않아? 오피스룩에는 이런 깔끔한 화이트 셔츠와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주얼리 아이템을 착용해 봐. 자꾸 매치하면서 스타일링해보는 게 중요해.’ 그 채널을 보고 있으면 옷을 입는 것은 욕망의 표현이며 즐거운 놀이다.

요즘 인스타그램에는 오오티디(#ootd)라는 해시태그가 많이 보인다. Outfit Of The Day의 약자로 그날에 입은 옷을 뜻한다. 이제 평범한 사람들도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스타일링이 돋보이도록 사진을 올리며 자신의 이미지, 어쩌면 자신이 되고 싶은 이미지를 구축해 나간다. 모 여성 커뮤니티에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저녁 약속을 위해 찾은 식당에서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본다면?’이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피하고 싶은 최악의 상황으로 규정하며 ‘다른 식당으로 간다’ ‘겉옷을 입는다’ ‘최대한 빨리 먹고 나온다’ 등의 답변을 했다. 옷은 나를 차별화하고 나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모 기관의 신입사원 채용에 면접위원으로 참석했다가 다소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듯, 면접자들이 전부 같은 옷을 입고 들어오는 것이다. 여성의 경우 검은색 치마 정장에 흰색 라운드넥 블라우스, 중간 높이 굽에 앞코가 둥근 검정 구두를 신었다. 블라인드 면접이라 심사자들은 지원자의 학력, 나이, 종교, 지역 등에 관한 질문을 할 수 없고, 이름조차 알 수 없다. 5명씩 그룹 지어 들어오는 면접자들을 오로지 수험번호에 의지해 구별하고 기억해야 했다.

내가 시각적 어지러움을 느낄 때쯤 주최 측에서도 ‘복장 규정 없는데 매년 이렇습니다’ 하며 아쉬워한다. 심사위원들도 ‘다른 옷 입은 사람 있으면 더 눈여겨 볼 것 같아요’ ‘요즘은 면접 코치해주고, 옷 빌려주는 곳이 있는 모양이에요’라며 한마디씩 보탠다. 우리는 불안할수록 타인과 같아지려 한다. 나를 표현하고 눈에 띄고 싶다는 욕망보다 혹시 모를 감점 요인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역대급의 치열한 경쟁률 속에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면접만 남겨둔 지원자들의 긴장한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나도 단점을 감추기보다 장점을 드러내고, 차이를 없애기보다 개성을 표현하는 쪽으로 옷 입기를 기꺼이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날을 대비해 나와 잘 어울리면서도 돋보이게 해 줄 옷을 미리 정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 오늘 뭐 입지.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