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촉발한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각국이 인종차별적 역사에 대한 청산 작업에 돌입했다. 과거 노예제나 백인 우월주의에 관련된 상징물, 기념비, 명칭 등이 곳곳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영국 BBC방송 등은 런던 도크랜즈 미술관 외부에 설치됐던 ‘노예 상인’ 로버트 밀리건의 동상이 철거됐다고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밀리건은 1700년대 후반 노예 교역을 하던 상인으로 자메이카에 2개의 사탕수수 농장을 소유하면서 520여명의 노예를 부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BBC는 크레인을 이용해 동상이 끌어내려진 순간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고 전했다. 미술관 측은 “밀리건의 동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 역사의 한 부분이며, 밀리건이 인류에 저지른 범죄의 잔재들과 여전히 싸우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무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밀리건의 동상이 철거되던 시각 옥스퍼드대 앞에선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세실 존 로즈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었다. 로즈는 1800년대 남아프리카 케이프주 식민지의 총독을 지내며 다이아몬드 채광권을 독점하고 철도 및 전신 사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노예제와 관련된 인물 동상이나 거리 이름 등을 없애는 방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인종차별 관련된 동상 등을 가려내고 철거하는 일은 공공영역다양성위원회를 설립해 맡기기로 했다.
칸 시장은 “런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이 풍부한 도시지만 노예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런던은 불편한 역사적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주말 브리스톨에서는 17세기 노예상이었던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이 강물에 처박혔다. 시위대는 런던 의회광장에 있는 윈스턴 처칠의 동상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서를 하기도 했다.
벨기에 앤트워프에선 옛 국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철거됐다. 레오폴드 2세는 1800년대 말 아프리카 콩고를 개인 소유지로 선언하고 학살을 자행해 ‘콩고의 학살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미국에서도 노예제를 옹호했던 남부연합 관련 상징물을 없애자는 의견이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ABC방송에 따르면 미 육군은 이날 옛 남부연합 지도자 이름을 딴 기지 명칭을 변경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미 해군도 “군 시설과 함정, 항공기, 잠수함 등 모든 공공장소에서 남부연합 상징물 사용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무엇을 제거할 것인지 가려내는 일은 경우에 따라 논란을 부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칸 시장은 “처칠 동상은 제거 검토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다”면서 “모든 사람이 완벽한 것은 아니며, 학생들은 역사 속 인물의 과오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교육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