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는 BMW 폭스바겐 포르쉐 등에 전기차용 배터리를 납품한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와는 거래가 없다. 기술적 문제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현대·기아차엔 파우치형 배터리가 들어가는데 삼성SDI의 배터리는 캔형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현대가 반도체에, 삼성이 자동차에 뛰어들었던 과거 때문에 아직도 두 그룹은 상대를 견제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양측이 주력 부문에서 협력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프랑스 르노에 자동차 사업을 넘기면서 완성차 시장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했던 삼성이 몇 년 전 자동차 전장 업체를 인수하자 현대차는 ‘삼성의 변심’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재계 안팎에선 수십년간 이어져온 양측의 ‘기싸움’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해외 자동차 메이커와 정보기술(IT) 업체가 미래차 개발을 위해 제휴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땐 더 그랬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손을 잡는다면 전기차·자율주행차 경쟁에서 치고 나갈 수 있는데, 양측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저 공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전고체배터리 개발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전격 회동한 것이다. 전고체배터리는 글로벌 기업들이 생사를 걸고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차세대 먹거리로, 한국판 뉴딜의 핵심 분야 중 하나다. 그래서 두 최고경영인의 만남은 정부 정책에 화답하는 모양새로도 비쳐졌다.
코로나19 사태로 초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산업계엔 협력 논의와 함께 상호 비방을 지양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까지 ‘QLED 전쟁’을 벌였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지난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 취하 의사를 밝혔다. 구광모 회장 취임 후 ‘빠르고 공격적’으로 변한 LG가 국내 경쟁사와 치른 대표적 분쟁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더 주목받았다. 결론 없는 싸움에 쏟아붓는 법률·마케팅 비용이 모두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가고, 실리는 중국 일본 경쟁사들이 챙긴다는 점을 고려한 현명한 결정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이제 재계에 남은 큰 분쟁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1년 넘게 벌이고 있는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 정도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지난 2월 조기패소 판결을 통해 LG화학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후에도 양측의 협상은 진전이 없는 상태다. 오는 10월 패소 판결이 최종 확정되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부품·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 및 영업금지 효력이 발생한다. SK이노베이션이 2조원을 들여 미국 조지아에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도 접을 수밖에 없다.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장에선 곤혹스러운 일로, 이에 트럼프 행정부가 ITC 소송 결과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 애플이 3G 통신 특허 침해 소송에서 삼성에 패소했지만 미 행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한 예가 있다.
그렇지만 거부권을 염두에 두고 SK가 협상에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면 이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LG도 감당하기 힘든 조건을 내걸고 SK에 백기투항을 요구하고 있다면 이 역시 현명한 태도로 볼 수 없다. 삼성-현대차 못지않게 SK-LG도 시너지를 낼 분야가 수두룩하다. 그린 뉴딜의 대표 분야인 배터리뿐만 아니라 통신·콘텐츠에 강점을 가진 SK-LG가 손잡는다면 콘텐츠 시장을 급속히 잠식하고 있는 넷플릭스에 제대로 맞설 수 있다. 아무튼 국내 배터리 대표 기업이 소송에 힘을 빼고 있는 사이 국가보조금을 받은 중국 업체는 급성장하고, 유럽 기업들은 컨소시엄 형태의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로 시장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