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사관학교에 떨어져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하루는 내가 다니던 수원북부교회 김학수 장로님이 따로 부르셨다. 나처럼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분이셨다.
“용한이, 앞으로 뭐 할 거냐.” “….”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장로님은 내 마음을 다 아신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신학대학에 가거라. 너는 목사가 될 사람이다.”
장로님은 총신대를 추천해 주시며 입학금 30만원도 대주셨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찬양대 지휘도 하는 등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그 모습을 좋게 보셨던 모양이다. 그런 내가 공군사관학교에 떨어지고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것이 마음이 아파 기도 끝에 내게 손을 내미셨던 것이다.
장로님의 권유에 나는 순종했다. 그렇게 또래보다 3년 늦게 총신대에 입학했다. 총신대에 들어간 것은 당시 내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간절함이 없었지만, 그렇게 하나님은 내 앞에 목회자의 길을 내셨다.
대학생이 됐다고 집안 형편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수원에서 서울 사당동 총신대까지 통학을 하다 몇 개월 안 돼 서울 약수동에서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통학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학비를 벌어야 대학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주 과외를 한 집은 2층 양옥집이었고 마당부터 현관까지 대리석이 깔린 으리으리한 부잣집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매일 저녁 그 집의 중학생 아들을 가르쳤다. 한 달 월급은 6만원. 그 돈을 모으면 30만원가량 했던 한 학기 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었다.
입주 과외를 하는 동안 부수입도 생겼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믿을만했던지 종종 집세 받아오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심부름을 다녀오면 수고비로 500~1000원을 주곤 했다. 여간 쏠쏠한 용돈 벌이가 아니었다.
그 시절 총신대 학생들은 돈이 없어 점심을 거르는 일이 많았다. 나도 그랬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과외 사례비 외에 점심값으로 매일 아침 500원씩을 줬는데 나는 그 돈으로 점심을 먹는 대신 책을 샀다. 사흘 치 점심값을 모아 책 한 권을 살 때면 배가 부른 듯했다. 그때 사서 읽고 모아 놓았던 누런 책들을 가끔 바라보노라면 새로운 기쁨과 희망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받곤 한다.
책을 사서 읽는 게 좋았지만, 배고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아침밥을 많이 먹고 학교에 가도 점심을 거른 탓에 오후 4시쯤 집에 돌아오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 시간에 밥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저녁밥 먹을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배가 너무 고플 때면 냉장고에 있는 물을 꺼내 마셨다. 부잣집답게 그 집 냉장고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쳤다. 그러나 입주 과외선생 신분이라 감히 음식에는 손을 못 대고 고작 물을 꺼내 먹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가정부 아주머니 방이 부엌에 붙어 있어 냉장고를 자주 열 수도 없었다.
2년 동안 입주 과외 선생으로 살았던 약수동은 지금 시무하고 있는 옥수중앙교회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밖에 안 떨어져 있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신학대학생 시절, 버스로 오가던 동네에 다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목회를 한다는 것이 지금도 이따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