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우리 집은 송탄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명문 수원고에 입학했다. 덕분에 신문을 배달하는 대신 고교 1학년 때부터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사는 초등학생 다섯 명을 모아 과외를 했는데 한 명당 한 달 과외비가 2000원씩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3개월 등록비가 1만 5000원가량이어서 나는 과외비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고교 3학년에 올라가서는 우등반에 배치됐다. 3학년이 총 360명이었는데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1등에서 60등까지 모은 특별반이었다. 대학에 꼭 가고 싶었지만, 우리 집 형편에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대학을 못 가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입시철이 가까워졌을 때 용기를 냈다. “아버지, 저 대학에 가고 싶어요.”
아버지는 한참 뜸을 들이시더니 등을 돌리시며 “네 마음대로 해”라는 한마디를 던지셨다. “가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공부 잘하고,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을 못 하셨을 뿐이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할 용기는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용기는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 대학등록금 낼 돈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해 우등반에서 대학에 가지 못한 학생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대학 대신 선택한 건 말단 공무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개월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근무지는 집 근처에 있는 원예시험장이었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서 좋기는 했지만,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날마다 나를 괴롭혔다.
끝끝내 대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대안으로 사관학교 진학을 꿈꿨다.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공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다. 이유 역시 간단했다. 공군 파일럿이 다른 장교보다 수당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공군사관학교 진학의 꿈을 품고 6개월가량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했다. 낮에는 공무원으로 살았고 저녁엔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그해 가을 나는 공군사관학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때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다. 벌써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군사관학교 입학의 마지막 절차였던 신원조회에서 ‘지원자 호용한’에 대한 판정은 합격에서 불합격으로 바뀌었다. 우리 가족 호적등본에 ‘미수복지 거주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난 온 아버지는 호적등본에 이북에 두고 온 아들딸 3명의 이름을 모두 다 올려놓았고 아들딸이 행정상 미수복지 거주자로 분류된 것조차 모를 정도로 힘든 생활을 했다. 이북에 가족을 둔 사람은 사관학교 입학을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그때만 해도 연좌제는 끊을 수 없는 무거운 족쇄였다.
청천벽력 같은 불합격 소식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도, 대한민국도, 얼굴도 모르는 북한 땅의 형과 누나들도 그리고 하나님도 원망스러웠다. 가난하게 자라게 하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앞길까지 막으시냐고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자리마저 잃었다. 사관학교에 합격한 줄 알고 공무원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