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대규모 개발계획으로 환골탈태했던 강남이 최근 또 한 번의 변화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사업 시행에 어려움을 겪던 현대자동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와 잠실 스포츠·마이스(MICE) 민간투자사업, 구룡마을 재개발 등의 계획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서울 3대 업무지구이자 부촌이 즐비한 강남이 주거 기능을 강화한 국제교류업무지구로 거듭나기 직전이다.
하지만 개발 계획이 순풍을 타면 투기 열풍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강남구와 송파구 일대 주택시장은 이미 대규모 개발계획의 진행 상황을 곁눈질하며 눈치싸움에 들어갔다. 정부도 최근까지 용산·여의도 등의 개발 계획을 발표할 때마다 투기수요를 잡느라 골머리를 싸맸던 기억을 떠올리면 신경이 거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는 아예 개발계획과 투기수요에 제동을 걸 계획을 동시에 발표하며 선제 대응에 나서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5일 잠실 스포츠·마이스 민간투자사업이 추진되는 송파구와 강남구 일대에 부동산시장불법행위대응반, 한국감정원 실거래상설조사팀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날은 서울시가 잠실종합운동장 부지에 스포츠 복합시설과 전시·컨벤션 공간을 조성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스포츠·마이스 민간투자사업 계획을 발표한 날이기도 했다. 지자체에서 개발 계획을 밝히는 동안에 정부에서는 투기세력에 엄포를 놓은 셈이다.
조사팀은 오는 8월까지 송파구 잠실동과 강남구 삼성동에서 미성년자 거래, 업다운 계약 의심 거래 등을 집중적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국토부가 투기 열풍이 채 뜨거워지기도 전에 서릿발 같은 대처에 나선 것은 최근 개발 계획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달 서울 용산구 철도정비창 일대에 대규모 상업·주거 업무공간으로 꾸미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계획이 좌초된 뒤 10년 넘게 공터로 남았던 땅을 주택 공급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 계획이 알려지자마자 용산 일대에 투기 조짐이 일었다. 구체적인 개발 계획이 세워지지 않은 정비창 부지 대신 인근 서부이촌동과 동부이촌동 등의 지역에서 호가가 급격히 뛰었다. 투기수요를 확인한 정부가 뒤늦게 이 일대를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설정해 거래를 제한했지만, 이번에는 규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경매에서 이 지역 건물 가격이 뛰는 등 시장이 들끓었다.
이처럼 정부가 부동산 거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도 투기 수요는 개발계획의 빈틈을 노리고 불붙는 현상이 반복됐다. 서울시는 앞서 2018년에도 여의도 용산 통개발 계획을 밝혔다가 일대 집값이 무섭게 뛰어오르는 통에 개발 계획을 접기도 했다.
실제로 잠실 스포츠·마이스 민간투자사업 계획이 발표되자 조금씩 투기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일대 부동산 시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송파구 잠실동 지역 대장주 아파트의 호가가 치솟았다.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인 상황에서 호가가 갑작스럽게 치솟은 것은 잠재적 투기 수요가 몰리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탄천을 사이에 두고 잠실 종합운동장과 마주 보는 GBC 개발 계획도 강남 일대 부동산 시장을 들썩이게 만드는 요인이다. 현대차는 2016년 한국전력 부지를 사들여 신사옥과 전시시설, 호텔·업무시설 역할을 겸하는 GBC 건립 계획을 밝혔다. 현대차에 따르면 GBC 건설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만 264조8000억원에 달하고 고용창출 효과는 121만5000명, 세수 증가분도 1조5000억원에 달한다.
GBC는 서울시 주요 구상에도 들어간다. 서울시는 잠실종합운동장 부지와 GBC를 묶어 국제교류복합지구로 조성할 계획이다. 여기에 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 코엑스 등과의 시너지도 기대된다. 이처럼 강남구와 송파구 일대가 통합 개발되며 시장의 기대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정부가 강남 일대 개발계획과 동시에 투기 차단 계획도 선제적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투기억제책을 동반해 개발계획을 발표하는 이런 방식은 향후 주요 개발 과정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국토부는 지난 5일 기획조사 계획을 밝히며 “향후에도 개발사업 추진 등으로 인한 주요 과열지역에 대해서는 대응반이 해당 지역의 특성에 따라 다각도의 고강도 기획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천명했다.
강남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 개발계획도 투기억제를 염두에 뒀다. 구룡마을은 구룡산과 대모산 자락의 사유지 위에 형성된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으로 1980년대 중후반 도시 내 생활터전을 상실한 철거민 1100여가구가 모여 거주하고 있다. 서울시는 11일 강남구 개포동 일대 ‘개포 구룡마을 도시개발사업’에 대한 실시계획 인가를 고시하기로 했다. 2016년 12월 구역지정 및 개발 계획 수립을 고시한 지 4년 만이다.
구룡마을은 강남 전역이 차례로 개발되는 동안 ‘강남 마지막 금싸라기 땅’으로 불리며 원래 모습을 유지해왔다. 구룡마을 개발과정에서도 투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에 서울시는 구룡마을 개발 원칙으로 원주민 전원 재정착과 로또 분양 방지를 내세우며 구룡마을을 총 4000여가구의 임대타운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기존 구룡마을 거주민의 재정착을 돕기 위해 짓는 임대주택 1107가구와 일반분양분 1731가구 중에서 일반 분양분은 모두 임대로 전환하는 방안이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