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예산 끊어라(Defund the police)”가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BLM)”와 함께 미국 흑인 사망 항의 시위의 핵심 구호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구호를 극좌파의 ‘경찰 폐지’ 운동으로 규정하며 시위대에 역공을 펼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7일(현지시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의 과잉 제압으로 숨진 뒤 미국 내에서 경찰 예산을 삭감하거나 경찰 조직을 해체한 후 재정비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경찰의 인종차별적 법 집행에 대한 항의가 미국 경찰권 축소라는 근본적 문제제기로 확대된 것이다.
워싱턴DC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광장 앞 대로에는 전날 밤 노란색 페인트로 ‘경찰 예산 끊어라’ 구호가 새겨졌다. 시민단체 ‘BLM DC’ 소속 활동가들이 BLM 문구가 새겨진 곳에서 3m 떨어진 곳에 이 문구를 더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시위대는 정치인들의 경찰 개혁 약속이 충분치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문구를 새겨넣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 경찰의 1년 예산은 1000억 달러(약 120조원)에 육박한다. 뉴욕시경찰(NYPD) 예산만 봐도 60억 달러(약 7조2000억원)로 웬만한 국가 예산 규모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예산에 비해 경찰 서비스는 형편없다는 비판이 이전부터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볼 수 있듯 흑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경찰을 공공안전의 수호자가 아닌 지역사회의 위협자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CNN은 8일 데이터 비교를 통해 미국 경찰의 폭력성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심각하다고 전했다. 미 법무부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6월부터 2016년 3월까지 미국 경찰의 체포 과정에서 숨진 사람은 1348명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기간 영국에서는 경찰 체포 과정에서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지방정부는 시위대의 경찰 개혁 요구에 화답하고 나섰다.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발생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시의원 13명 중 9명은 이날 성명을 통해 “시경찰청 해체와 경찰 예산 지원 중단·삭감을 추진하겠다”며 “우리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지켜줄 새로운 공공안전 모델을 재건하는 데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도 “뉴욕경찰 예산을 삭감해 이 중 일부를 청년 서비스와 사회복지로 돌리겠다”고 밝혔다. 앞서 에릭 가세티 로스앤젤레스(LA) 시장도 최대 1억5000만 달러의 경찰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경찰 예산 지원 중단 움직임을 법과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졸린 조 바이든과 극단적 좌파 민주당 인사들은 경찰 예산 지원을 끊어버리길 원한다”며 “나는 훌륭하고 충분한 재원을 지원받는 법 집행을 원한다. 나는 법과 질서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AP통신은 민주당 인사들이 범죄에 미온적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기 위해 트럼프가 시위대의 구호를 악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엘릭스 비탈레 브루클린대 사회학 교수는 ‘경찰 예산 끊어라’ 구호에 대해 “누군가 스위치를 누르면 경찰이 사라지는 상황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경찰의 역할을 다시 정비하자는 얘기”라고 NPR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이형민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