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차기 대권 주자들이 기본소득제 관련 논쟁에 잇달아 뛰어들면서 기본소득제가 정치권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처음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할 대책 중 하나로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시됐지만, 최근에는 복지정책에 대한 여야 잠룡들의 관점을 보여주는 지표로 기능하고 있다.
여야 잠룡들의 ‘기본소득제 고지전’을 둘러싼 정치권의 시각은 엇갈린다. 사회복지제도 전반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전기가 마련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재원 방안은 물론 개념 정립이나 방법론에 대한 공감대 없이 논의가 ‘퍼주기식’ 포퓰리즘식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일단 여야는 치열한 주도권 선점 경쟁을 벌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가장 먼저 기본소득제 논쟁에 불을 지핀 건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3일 “배고픈 사람이 빵을 먹을 수 있는 물질적 자유 극대화가 정치의 목표”라며 기본소득제 도입을 공론화한 데 이어 다음 날에는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라며 정치권 논의를 공식 제안했다.
보수 야당이 이슈를 선점한 뒤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대권 주자들이 앞다퉈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건 이재명 경기도지사다. 이 지사는 기본소득제 도입은 불가피하며, 가능한 범위부터 우선 도입해 점차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기본소득제가 차기 대선의 핵심 의제”라며 “통합당이 기본소득을 그들의 주요 어젠다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경계했다.
이 지사는 앞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이전에 전체 경기도민을 상대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이슈 선점 효과를 누렸고, 그 영향으로 최근 여론조사에서 여권 대선 주자 선호도 2위를 달리고 있다.
여권 선두 대선 주자인 이낙연 민주당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장도 8일 입을 열었다. 이 위원장은 페이스북에 “기본소득제의 개념과 복지체제, 재원 확보 방안 등에 대한 점검과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적었다.
문제는 기본소득제 재원 방안을 비롯한 깊이 있는 정책적 논의 없이 정치권에서 백가쟁명식의 공허한 논쟁이 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제 논쟁에 각자 한 마디씩 얹는 형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면서 해당 이슈가 존재감 부각 등 차기 대권을 위한 발판으로 소비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현재 기본소득제 논의는 대권 주자 간 미묘한 ‘기싸움’을 펼치거나 각자 관점을 보여주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기본소득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것이 전 국민 고용보험제 전면 실시”라고 말했고, 김부겸 전 의원도 “기본소득 논의가 국가의 복지 책임을 건너뛰자는 주장으로 가서는 안 된다. 복지 없는 기본소득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이 이날 “다만 기본소득제의 개념은 무엇인지, 우리가 추진해온 복지체제를 대체하자는 것인지 보완하자는 것인지, 그 재원 확보 방안과 지속 가능한 실천 방안은 무엇인지 등의 논의와 점검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단서를 단 것도 이런 상황을 인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실제 민주당 정책위원회는 기본소득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논의된 바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위원장 측 관계자는 “이재명 지사가 말하는 ‘단기 목표 연 50만원’의 기본소득 도입이 단순히 생활보조금 수준인 건지, 소득이라고 보기엔 너무 적은 것은 아닌지 등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낙연 이재명 박원순 등 인물 중심 개념으로 이야기되거나 정부에 압박이 되는 건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른 민주당 관계자도 “재원 마련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단순히 기본소득제 도입 여부를 두고 논쟁하는 건 공허하다”고 말했다.
자유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기존 보수의 가치와 대표적인 진보 이슈인 기본소득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한 고민이 야권에서도 시작됐다. 김용태 전 통합당 의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기본소득제가 사회주의 가치인지, 보수의 가치에 반하는 것인지, 보수의 가치 중 어디에 반하는지 등을 놓고 논쟁을 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현재의 불평등 구조가 이어지면 공동체가 공멸로 갈 게 뻔한데 보수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보수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권 잠룡으로 꼽히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조만간 정책연구소를 열고 관련 연구를 할 것으로 전해졌다.
기본소득제는 사회주의 배급제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무소속 홍준표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지금 논의되는 기본소득제의 본질은 사회주의 배급제도를 실시하자는 것과 다름없다”며 “기본소득제가 실시되려면 세금이 파격적으로 인상되는 것을 국민들이 수용해야 하고, 지금의 복지체제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코로나19로 경제적 기반이 붕괴돼 가는 것을 회생시킬 생각은 않고 사회주의 배급제도 도입 여부가 쟁점이 되는 지금의 정치 현실이 참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국민 찬반 여론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리얼미터가 지난 5일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의견을 조사한 결과(95% 신뢰 수준에 표본오차 ±4.4% 포인트) 응답자의 48.6%가 ‘최소한의 생계 보장을 위해 찬성한다’고 답했다.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고 세금이 늘어 반대한다’는 응답은 42.8%로 집계돼 찬반 의견이 오차 범위 내에서 맞섰다. ‘잘 모른다’는 응답은 8.6%였다.
신재희 이상헌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