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 일곱 식구가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살다 보니 학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한 달에 100원하는 기성회비를 한 번도 못 내보고 졸업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중학교 3년 내내 신문 배달을 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등록금을 내야 했다.
당시 석간신문 한 달 구독료는 280원이었다. 처음 배달을 시작할 때는 신문 70부를 돌렸는데 두 달 만에 140부로 늘었다. 신문 한 부가 늘어날 때마다 50원씩을 더 받았다. 신문사 총무는 “용한이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며 칭찬해줬다. 칭찬 듣는 것도 좋았는데 돈 버는 재미도 여간 쏠쏠하지 않았다.
수입은 늘었지만, 신문 부수가 느는 만큼 몸은 고됐다. 70부는 혼자 할 수 있는 분량이었지만 140부는 혼자선 감당이 안 됐다.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신문사 지국으로 달려갔다. 신문 140부를 받아 그중 40부를 네 살 아래 남동생에게 맡겼다. 동생에게 집 가까운 곳 배달을 맡기고 나는 신문 100부를 겨드랑이에 끼고 이 집 저 집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렇게 배달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저녁 8시 무렵이 됐다. 추운 겨울, 꽁꽁 얼어버린 고구마에 뭇국, 허연 김치로 배를 채우고 나면 금방 곯아떨어지곤 했다.
신문 배달은 배달로만 끝나지 않는다. 배달한 집을 찾아다니며 수금도 해야 했다. 한번은 철도 건널목 너머에 있는 이발소로 수금을 갔다. 여섯 달째 신문값을 내지 않아 여간 골칫거리가 아닌 고객이었다. 그날도 수금을 해오라는 신문지국 총무의 성화에 못 이겨 이발소를 찾아갔다. 오늘만은 꼭 수금하리라 마음을 다잡고 이발소 문을 열었다. 마침 주인이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크게 숨을 내쉬고 입을 뗐다. “아저씨, 밀린 신문값 주세요.” 주인은 힐끗 쳐다볼 뿐 아무 대꾸도 없이 이발에 집중했다. “신문값 달라니까요.” 제법 큰 소리로 말했더니 그제야 주인은 “내일 와. 지금 바빠”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시 “오늘 꼭 받아오라고 했어요”라고 말했고 주인은 “내일 와”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 같은 말이 오갔는데 어느 순간 주인이 노발대발하더니 욕을 퍼부었다. 그깟 몇 푼 안 되는 신문값 떼먹겠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놀라서 아무 소리 못 하고 그 욕을 다 듣고만 있었다.
“이놈 봐라. 조그만 놈이 말도 안 듣네.” 온갖 욕이 주인 입에서 쏟아졌다. 까무잡잡한 까까머리 중학생이 호통을 당하는 게 불쌍했던지 머리를 깎고 있던 손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예끼, 추운 겨울 어린애가 신문까지 돌리며 공부하려고 하는데 잘 달래 보내지 왜 소리를 쳐요.” 손님의 말을 들은 나는 설움에 복받쳐 눈물이 터졌고 그 자리에 선 채 엉엉 울었다. 울면서도 “내일은 꼭 신문값을 줘야 한다”며 몇 번이고 주인에게 부탁했다.
한번 터진 눈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쉬이 멈추질 않았다.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신문 배달을 해야 하는지’ 부모님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해 힘든 수금까지 해야 하는 신문 배달의 고달픔, 이발소 주인에 대한 미움까지 뒤섞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원망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시냐고 원망하며 어두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