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가 만든 ‘400번의 구타’에는 열네 살 소년이 나온다. 아이를 돌볼 의사도, 능력도, 관심도 없는 부모에 의해 폭력과 범죄에 노출된 앙트완은 소년원에 들어가 간수들에게 사정없이 구타당한다. 그는 끊임없이 탈출하지만, 마지막에 이른 곳은 더 도망칠 수 없는 거친 바다 앞이다. 마지막 장면은 한없이 성난 파도를 보는 앙트완의 얼굴이다. 당혹스러움과 절망에 지배된 듯 초점 잃은 그의 눈이다.
어린이날이던 지난달 5일 충남 천안의 한 아파트에서 112 신고를 했다. 한밤중 아이가 심하게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웃의 신고였다. 출동한 경찰은 아홉 살 남자아이의 온몸에서 멍과 담뱃불 자국들을 발견했다. 2.5㎝ 정도 찢어진 머리상처도 있었다. 병원은 가정폭력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내놨다. 경찰은 그냥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또래보다 훨씬 왜소하고 마른 아이는 말이 없었다. 한 달 후 이 소년은 의붓엄마가 가둔 여행용 가방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그리고 며칠 뒤 숨졌다. 키는 130㎝, 몸무게는 23㎏. 아이의 사망기록에는 그렇게 기입됐다.
아이가 거짓말을 해서 가방에 들어가라고 했고, 3시간 정도밖에 안 됐다던 의붓엄마는 경찰조사가 시작되자 속속 행적이 드러났다. 7시간이나 가방에 아이를 넣어 잠갔고, 그 사이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까지 했다. 아이를 가방에 가둘 때 바로 옆엔 자기 배로 나은 친자식 남매가 지켜보고 있었다. 숨진 아이와 같은 나이의 친자식 남자아이 몸무게는 40㎏이 넘었다. 이 엄마는 이런 친자식이 우량아라고 인스타그램에 ‘자랑질’을 했다. 우리나라 아홉 살 사내 어린이의 평균 몸무게는 27.8㎏. 여자는 26.9㎏이다. 숨진 아이는 여자아이들보다도 비쩍 말라 있었던 셈이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학대해 숨지게 하는 사건은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 고의로 살해하거나, 숨질 때까지 방치한 경우는 아동학대의 극단적인 형태다. 대부분 결손가정에서 자라 의붓어머니, 의붓아버지에 의해 상습적으로 구타당하고 일상적인 괴롭힘에 내몰린 경우다. 아동학대에는 이런 극단적인 형태만 있진 않다. 가벼운 체벌이라며 눈감아버리는 수많은 형태의 아동학대가 아마도 한국엔 상존하고 있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인 추측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네 부모들의 훈육방법은 ‘호랑이형’으로 고착돼 왔다. 미국 예일대 교수인 에이미 추가 2011년에 쓴 ‘호랑이 엄마의 투쟁’이란 책엔 ‘타이거맘’(Tiger Mom)의 정의가 나온다. 요지는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벌칙과 상을 명확히 하라는 거다. 타이거맘이 택하는 가장 손쉬한 훈육법이 바로 체벌이다. 더 정확히는 구타다. 규칙을 정하고 지키지 않으면 행하는 손찌검 말이다. 타이거맘을 묵인하고 체벌을 용인하는 사회는 아동학대를 방치할 수밖에 없다. 경찰이 학대당한 아이를 학대한 부모에게 다시 돌려보내는 게 바로 그렇다.
범죄를 차단해야 할 경찰관이 폭력과 수치, 횡포를 가한 사람들에게 “부모니까 알아서 하겠지” 하며 자신을 넘길 때, 아홉 살 천안 소년은 절망했을 것이다. 집이란 이름의 고문장소에 끌려가 매일 당해야 할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을 것이다. 경남 창녕의 한 편의점에서도 아홉 살 소녀가 발견됐다. 경찰관이 화상 입은 손에 대해 묻자, 앙상한 소녀는 “새아버지가 뜨거운 프라이팬으로 지졌어요”라고 답했다.
세상의 앙트완, 천안과 창녕의 아홉 살 소년 소녀에 대한 학대를 막을 장치를 고민할 때가 됐다. 독립적인 아동복지기관이 생겨야 할 때가 됐다. 부모 의무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부모란 권리를 빼앗는 데 주저해선 안 될 때가 됐다.
신창호 사회2부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