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의혹과 관련해 구속 기로에 섰다는 소식에 착잡했다. 삼성을 출입하는 동안 내부 관계자에게 경영권 승계 논란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 증여 사건은 무죄 판결이 났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사건은 법적인 논란이 있다”며 신중했다. 또 다른 이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것은 기업의 본질적 원리다. 합병은 순환출자를 끊으면서 경영권을 다진 것”이라며 지지했다.
삼성은 막대한 경제 자본을 축적했다. 1987년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당시 삼성그룹 총 매출은 17조원이었다. 이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2014년 매출은 318조였다. 18배 이상 성장했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은 무려 230조원이었다. 삼성전자의 해외 매출은 한국 전체 수출액의 약 20%를 차지한다. 이쯤 되면 “삼성이 휘청이면 한국 경제가 휘청인다”는 말이 엄살이 아니다. 이 회장은 7년간 적자를 보면서도 반도체에 투자해 93년 메모리 반도체 부문 1위에 올랐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마트폰, TV 판매도 글로벌 1위다. 삼성의 자산은 802조로 재계 1위다.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기업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삼성이 쌓은 기업 신뢰 지수는 어떨까. 세계적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가 공동체 내 협력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핵심으로 봤다. 신뢰는 사회 구성원들이 윤리와 규칙 등을 지킬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막대한 경제 자본에 비해 삼성의 신뢰 자본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진다. 경영권 승계 의혹은 이 신뢰 자본을 훼손하는 핵심 사건이다. 삼성에버랜드는 1996년 CB를 주주 우선으로 헐값에 발행한 뒤 CB를 이 부회장에게 배당했다. 이건희 회장 등이 배임 혐의로 기소됐지만 2009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주주 스스로 배정을 포기했기 때문에 배임이 아니라는 판결이었다. 삼성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사건도 에버랜드 CB 사건과 같은 결말이 나길 기대할 것이다.
일련의 행위는 삼성전자에 대한 이 부회장의 경영권을 최소 비용으로 강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왔다. 삼성전자 지분이 0.7%에 불과한 이 부회장은 부친 이 회장의 지분 4.18% 일부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상속세가 12조원 이상이다. 반면 합병을 하면 제일모직 최대주주인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통해 삼성전자의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들더라도 삼성이 논란이나 오해의 소지 없이 경영권을 승계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삼성은 한국 대표 기업으로서 우리 사회의 윤리와 신뢰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에버랜드 CB 사건이나 삼성물산 합병 과정을 보고 여러 기업이 이를 따라 했다는 얘기가 있다. 심지어 목회자 세습 금지 규정을 둔 기독교 교단 소속 대형 교회는 이 규정을 피하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사례를 연구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삼성이 하니까, 우리도 이렇게 하자”고 했을 것이다. “신뢰는 한두 사람의 미덕이 아닌 국민 모두의 재산이다” “기업 시민으로서 사회적 인격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 “기업이 사회적 요구에 관심을 갖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은 기업의 보이지 않는 책임이다”…. 이 회장이 유일한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에서 한 말이다. 합병 사건은 유무죄와 상관없이 삼성이 신뢰라는 관점에서 이 책임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묻고 있다.
강주화 산업부 차장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