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7년 경기도 평택 송탄에서 가난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해도 은율에서 5남매를 낳아 기르시던 부모님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나마 자식들을 다 데리고 내려올 수 없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은 할머니에게 잠시 맡긴 채 여덟 살짜리 맏아들과 젖먹이 막내딸만 데리고 월남했다. 그리고 송탄 미군부대 앞에 터를 잡고 나를 포함해 자식 셋을 더 낳으셨다.
믿음이 좋으셨던 아버지는 은율에 사실 때 교회 영수(領袖)로 섬기셨다. 피난 내려와 송탄의 작은 움막집에 살 때도 피난민들과 함께 우리 집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작은 가정교회였지만, 부모님은 토요일이면 온종일 집안을 쓸고 닦았고 어머니는 주일예배 후에 국수를 한 소쿠리 삶아 교인들을 대접했다. 우리 집에서 시작한 그 교회가 현재 송탄제일교회의 모태가 됐다.
6·25전쟁 직후 너나없이 가난했지만, 피난민인 우리 집은 유난히 더 가난했다.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퇴직하신 후 목수 일을 하셨는데 큰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감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겨울이면 특히 고역이었다. 행여나 일감이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집을 나섰고 쌀가게에 가서 수십 번 머리를 조아려 한 말에 200원 하는 쌀을 외상으로 얻어오곤 했다. 외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쌀을 꾸는 것이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배가 고파 퀭한 눈을 한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갈 생각을 하며 어머니는 온갖 수모와 설움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집에서는 배가 고파도 견딜 만했지만, 학교에서 배를 곯는 일은 눈물 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입에 들어갈 밥은 없어도 점심 도시락만은 꼬박꼬박 싸주시려 애를 썼다. 그러나 밥은 겨우겨우 싸가도 반찬은 못 싸갈 때가 많았다. 그나마 또래 친구들 역시 대부분 가난한 처지라 스스럼이 덜했고 나는 내가 싸 온 꽁보리밥에 다른 아이들이 싸 온 반찬을 얻어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 가장 먹고 싶었던 건 부잣집 아이들이 싸 온 계란 프라이였다. 밥 위에 올라가 있는 노릇노릇한 계란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내가 어른이 되면 꼭 하루에 하나씩 계란을 먹어야지 결심했다. 교회에 갈 때면 나도 맘껏 계란을 먹고 싶다는 원망과 눈물 섞인 기도를 하곤 했다. 어릴 적 나는 엄마와 같이 다니는 걸 몹시도 싫어했다. 친구들과 놀다 멀리서 엄마가 보이기라도 하면 일부러 길을 돌아갈 때도 많았다. 우리 엄마는 멀리서도 얼른 눈에 띄었다. 어릴 적 다친 다리로 평생을 심하게 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그지없다. 엄마는 나를 위해 하루도 쉼 없이 믿음으로 평생 기도해 주셨다.
겨울철 길이 미끄러워 새벽 기도를 못 갈 때는 냉기가 올라오는 작은 방으로 건너가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서 기도하셨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판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온기라곤 전혀 없는 작은 방에서 엄마는 기도 때마다 많이도 우셨고 그 울음은 잠자는 중에도 내 귀에 아련하게 들렸다.
어머니께서 천국에 가신 지 15년이 지났다. 얼마 전 산소에 찾아가 “엄마, 미안해. 내가 너무 몰랐어”하며 무덤 속에 침묵하고 계신 엄마에게 눈물로 나의 잘못을 고백했다. 엄마의 기도 소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내게 왜 그렇게 크게 들려오는지, 내 가슴을 왜 그리도 후려치고 있는지….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