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의기억연대 사태와 강제징용 문제가 연일 뉴스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5월 7일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을 계기로 위안부 피해자가 배제된 시민단체의 공금사용이 문제가 되면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대구지법 포항지원이 8월 4일자로 압류명령에 대한 공시송달을 확정하면서 일본 전범기업 자산에 대한 매각명령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위안부 문제가 국내 갈등으로, 강제징용 쟁점이 국제 갈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제하 과거사 문제가 새삼 국내외를 막론하고 논란이 재연되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전후보상 부재에 있지만, 국내 사법부 판결이 과거사 문제를 규정해 온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민주화와 탈냉전 이후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가 쟁점화되면서 피해자 구제와 보상을 둘러싼 시민단체의 운동이 활발해졌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양국은 일제강점이 불법이라는 사실에 합의를 보지 못했다. 유무상 5억 달러 청구권자금은 경부고속도로와 지하철 1호선, 포항제철과 소양강댐 등 오로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에 반발한 피해자와 지원단체는 한·일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해 왔다. 처음에는 일본 사법부에, 나중에는 한국 재판소에 일제 불법점거하 반인도적인 인권침해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2011년 8월 위안부 문제 부작위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양국 정부에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 12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정해진 의제를 무시하고 오로지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였다. 일본 측 무성의에 화가 난 그는 다음 해 8월 독도를 방문하였고, 한·일 관계는 크게 악화하였다. 결국 2015년 12월 양국은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지만 정대협 등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닥쳤고, 화해·치유재단은 현재 해산된 상태다.
2018년 10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은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면서 1910년 강제병합의 불법성, 전범기업의 비인도적인 노동 착취,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 위자료 지급을 명령하였다. 한·일 양국은 1910년 일제 강제합병의 성격 등 주요 쟁점을 재차 다루게 되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아미쿠스 쿠리에(Amicus Curiae: 법원의 친구)라는 제도를 통해 외교부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지만, 한국 사법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요구한 국제사법재판소 부탁(付託)이나 청구권협정 3조 2항 중재위원회 설치를 거부하고 양자 간 외교협상을 선택하였다.
사법부가 규정한 과거사로서 ‘강제징용’은 ‘일본군 위안부’의 외교 쟁점화와 유사하지만 피해자구제 범위와 해법이 훨씬 더 광범위하며, 복잡하고 심층적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 측에 청구권협정 준수를 요구하면서 어떤 사죄와 보상도 거부하고 있는 것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다른 점이다. 일본 측이 오히려 우위에 서서 한국 측에 국제법을 준수하라거나, 국내 입법조치를 요구하는 점도 매우 다른 특징이다.
강제징용 쟁점은 사법부 판결이 역사갈등으로, 역사갈등이 통상과 안보갈등으로, 더 나아가 국민 상호 간 반감으로 증폭된 점이 사뭇 다르다. 수출규제와 지소미아 문제의 배경에 있는 강제징용 해법을 둘러싸고 한·일 간 강경 대치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사법부 판결 존중, 삼권분립 원칙, 개인청구권, 피해자 중심주의 vs 일본의 국제조약과 청구권협정 준수, 국내 입법조치로 한국 측이 처리해야 한다는 대립구도를 보이면서 상대방에 귀책사유가 있음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사법부가 한·일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