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제목을 듣고는 대학 철학과의 기초강의 교과서 정도 되는 줄 알았다. 3년 동안 창살에 갇혀 지내던 그가 마침내 데카르트가 하던 존재론적 고민을 하게 된 걸까 생각했다. 출판이 예고된 책의 표지를 뜯어 보니 맨 위에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는다는 뜻의 ‘회오기(悔悟記)’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온 나라가 전례 없는 난리를 겪도록 한 게 미안해 글줄로라도 참회하겠다는 의미겠거니 짐작했다.
표지 아래에 적힌 글귀를 보고선 고개가 갸우뚱했다. 책의 도입부에서 따왔을 법한 문장들에서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어왔다’며 ‘권력자의 곁에 있었다는 이유로 항변 한 번 제대로 못 했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사실관계와 진실’을 밝히겠다고 으름장도 놨다. ‘회오기’라는 거창한 이름에는 별로 들어맞지 않는 내용 같아 보였다.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잘못한 게 과연 있는지 한번 따져보자는 것에 가깝지 않나.
자서전이란 유명인들의 전유물이다. 사회적으로 큰 성취나 잘못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개인사의 내막 따위를 다른 이들이 궁금해할 일이 없다.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부터 엄청난 부를 벌어들인 기업인, 세상이 경악할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이들 삶의 인간적 면모를 비롯해 성취, 혹은 잘못의 뒷이야기를 궁금해한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쏟아져 나오는 국회의원들의 자서전처럼 예외도 있지만 그런 책들은 존재했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그가 굳이 강조하는 ‘최서원’이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겠지만, 자주 불렸던 옛 이름 ‘최순실’은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중 모르는 이를 찾는 게 더 어렵다. 첫 전제조건은 쉽게 충족한 셈이다. 게다가 그가 유명한 이유는 희대의 범죄 행위다.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감히 민주국가에서 선출된 최고권력의 힘을 빌려 사적 이익을 채운 건 같은 예를 찾기 힘든 범죄다. 잘 팔리는 자서전의 조건에 모자람이 없다. 아마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이 글이 유명세를 보탤까 걱정도 되지만 이미 그 수준은 넘어선 듯하다.
대개 범죄자의 회고는 결국 자기변호로 채워진다. 그간 보도를 보면 재판에서 그를 제대로 변호 못 한 변호사가 책을 쓰라 권유한 모양이니 짐작이 틀릴 것 같지는 않다. 공동운명체이자 공동정범이던 전 대통령과의 인연, 또 어떻게 불가피하게 청와대를 들락거렸는지와 어머니로서 부린 욕심이 얼마나 사소하며 인간적인지를 강조할 것이다. 검사들이 그를 얼마나 모질게 다그쳤는지와 언론이 해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억울함이 페이지를 메울 것이다.
범죄자에게 억울함은 상수나 마찬가지다. 수습 시절 경찰서에서 만난, 이름과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범죄자들의 공통점은 죄를 뉘우치는 경우가 없다는 점이었다. 경찰서 로비에서 억울함을 한참 늘어놓는 이들의 사연은 자신에게 불리한 정황이 빠져있다.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비어있는 그 자리를 지적하면 말을 얼버무리거나 불쾌해하며 자리를 뜬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을 쉽게 분간할 수 없다. 이번 자서전의 주인공이 그 범주에 있을 확률도 아마 그리 높지는 않을 것이다.
내용조차 뻔할 책이 걱정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느 때보다 각 진영의 서사가 게토화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다시 강화할 게 분명하다. 단순히 자기변호를 위해 쓰인 책일지라도 용도는 쓰이기 나름이다. 법원이 수개월 수년을 걸쳐 내린 결론과 상관없이, 책은 그들에게 또 다른 참고서 혹은 성서가 될 것이다. 이미 사회적 평가가 굳건한 다른 대통령, 아니 범죄자의 자서전조차 사건 수십년이 지난 한국 사회에서 분열을 일으킨 예가 있다. 범죄자의 자기변호가 새로 등장하기에 3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