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유혹은 강렬했다. 난생처음 만져보는 큰돈에 미소가 쉬 사라지지 않았다. 2001년 옥수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넉 달쯤 됐을 때의 일이다. 한 권사님의 팔순 감사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권사님의 아들이 감사 인사와 함께 “한국에서는 아이들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드니 정착금으로 쓰시라”며 봉투 하나를 건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봉투를 열어 보곤 눈이 번쩍 뜨였다. 수표 두 장. 그것도 1000만원짜리였다. 나와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이고 내가 어떻게 사용하든 누구 하나 뭐라 할 이는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조용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옥수중앙교회에 부르시고, 몇 달 안 돼 이렇게 큰 물질을 주신 것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닐까.’ 기도하며 조용히 묵상한 끝에 어렴풋하게 주님의 생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며칠 뒤 그 돈은 장학금이란 이름으로 옥수중앙교회 공동체의 소유가 됐다. 이는 교회가 지난 20여년간 해온 수많은 구제와 장학 사업의 마중물이었다.
옥수중앙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해 쉼 없이 손 내밀 수 있었던 건 주위에 가난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교인들 역시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동네가 됐지만, 부임 당시 서울 성동구 옥수동과 금호동은 말 그대로 달동네였다. 자동차 한 대 지나기 어려울 만큼 좁고 비탈진 골목길이 많았고, 주민들 대부분이 고단하고 팍팍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우리 교인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교인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가사도우미, 식당 종업원, 일용직 노동자, 택배기사, 택시기사 등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한 달에 채 100만원을 못 버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나 역시 피난민의 자녀로 태어나 가난이 어릴 적부터 몸에 뱄다. 사정이 그랬기에 나와 우리 교인들은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의 눈물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2001년 그해, 옥수중앙교회는 새로 부임한 목사가 대심방을 다닐 때마다 어려운 교인들이 도서비로 전해준 1500만원까지 합쳐 3500만원을 ‘위로’란 이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냈다. 어린이와 중고생 급식비, 대학생 장학금, 독거노인 전기세 등 여기저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눴다. 각종 절기에는 쌀과 라면을 전했다. 겨울이면 김장김치를 담가 겨울 찬거리를 걱정하는 노인과 장애인 가정의 시름을 달랬다. 달동네 교회였지만, 하나님은 옥수중앙교회를 귀하게 사용하셨고 우리는 그 인도하심에 묵묵히 순종했다.
2003년부터는 독거노인들의 영양 섭취를 돕기 위해 우유 배달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고독사 방지’란 목적이 더해지고 사역이 확장돼 지금은 서울 시내 16개 구에 사는 독거노인 2000가정에 매일 아침 신선한 우유를 배달한다.
얼마 전 성동구에서 독거노인 한 분이 숨진 지 사흘 만에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역경의 열매’ 게재 요청을 받았다. 성경에서 배운 것을 그저 행했을 뿐이데 무슨 이야깃거리가 될까도 싶고, 괜히 교만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도 든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걸어온 길을 찬찬히 되짚어 보려 한다. 연약한 자를 어르고 달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내의 이야기다.
약력=총신대, 총신대 신대원 졸업. ‘생명의 삶’ 편집장 역임. 현 어르신의안부를묻는우유배달 이사장, 서울 한영대 겸임 교수.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