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여행이 어려울 때면 몇몇 방식으로 해소해왔다. 코로나19로 지역 간 이동까지 제한되는 요즘에는 얼마간 간절한 마음까지 더해진다. 이를테면 지도에서 알려주는 가장 빠른 길에서 슬쩍 벗어나는 것이다. 일상에서 방향만 조금 틀어도 여행처럼 낯선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번번이 지나쳤던 장소의 숨은 이야기를 찾는 것도 괜찮았다. 내게는 그저 우연히 동창을 만났던 자리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별의 순간이나 지갑을 잃어버렸을 거라는 짐작으로 읽혔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하던 전봇대마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근래에 한 가지 방법을 더 찾았다. 가까운 문학관에 가보는 것이다.
4월부터 춘천의 김유정문학촌에 상주작가로 머물고 있다. 관람객 입장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이 문학의 온기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문학관은 100여개에 이른다. 작가나 지역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 곳부터 공립과 사립까지 성격과 규모도 다양하다. 시작은 1981년 만해기념관으로 보고 있다. 문학관이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시기는 1990년대 초라고 전해진다. 해외에 비하면 역사가 짧은 편이다. 일본에 600개 넘는 문학관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최근 양적 팽창뿐만 아니라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어 반갑다. 이 시도에 관람객들도 응답하고 있다.
그동안 문학관은 작가나 작품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간의 의미가 컸다. 글쓰기와 읽기 이후에 남겨진 작업을 충실히 해온 셈이다. 중요한 기능이지만 이는 경직된 분위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제를 파악해 문제를 푸는 대상에서 즐기는 대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행 계획을 세울 때도 문학관은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을 때가 잦았다. 하지만 최근 변화를 주목해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김유정문학촌은 지난달 강원도 내 첫 공립문학관이 됐다. 이에 따라 앞으로 내디딜 걸음에도 힘이 실렸다. 얼마 전 추모공연에서도 뜻깊은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 야외 무대가 아닌 김유정 생가를 무대 삼아 무용, 낭독, 연주가 이뤄졌고 스크린으로 영상까지 즐길 수 있었다. 김유정의 생을 돌이켜보는 생가가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이는 문학의 본질을 잃지 않은 채 다채로운 예술 장르를 품어 작가와 작품에 입체적으로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충북 옥천의 정지용문학관에는 문학자판기가 설치돼 눈길을 끌기도 했다. 시는 책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색다른 발상이었다. 이를 통해 부담 없이 문학작품을 접해볼 수 있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사이버문학관이 열리고 SNS를 활용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작가와 독자는 책을 통해 처음 만난다. 문학관은 작가와의 내밀한 대화로 독자와의 관계를 조밀하게 채워주고 지속시켜준다. 책에 나와 있지 않은 작가의 고민과 작품을 썼을 때의 상황을 오롯이 전해주는 덕분이다. 문학은 그 자체로 읽었을 때보다 당시의 문화나 작가의 삶과 연결했을 때 풍성해진다. 그래서 문학이 문학관을 통하면 책 안에만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공간과 사물에도 빼곡하게 스며든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의 주변에도 문학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문학관에 가면 오래전 누군가 이 동네에서 밤새 불을 밝히면서 문장을 썼고 소설 속 주인공이 골목을 헤매며 사랑을 고민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순간 별 볼 일 없던 골목은 각별해진다. 문학은 대상의 의미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유연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관을 찾는 것은 선뜻 어딘가로 떠나기 어려운 때에 가장 손쉬운 여행이 된다. 머뭇거리는 걸음에 힘을 실어 봐도 좋겠다. 지금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좋은 시기에는 더더욱.
전석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