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의 역사는 피로 쓰였다

입력 2020-06-04 19:49
유럽 공역에서는 민간 여객기가 관제소와 사전 교신 없이 자국 영공으로 진입하면 전투기가 출격한다. 최고 속도가 시속 2495㎞에 달하는 전투기 유로파이터는 여객기를 따라잡은 뒤 조종실 상황을 육안으로 확인하게 된다. 사진은 2016년 3월 2일 여객기 요격 훈련을 하는 독일 공군의 유로파이터. 웨일북 제공

지금이야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는 사람이 드물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비행기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예컨대 1920년대 서구인에게 비행기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 뉴욕에서 한 부동산 재벌이 비행기로 미국과 프랑스 사이를 논스톱 횡단하는 조종사에겐 2만5000달러 주겠다고 선언해 크게 화제가 됐다. 7년 동안 많은 조종사가 ‘도전’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 그러다가 등장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찰스 린드버그. 그가 모는 비행기는 1927년 5월 20일 미국 뉴욕 루스벨트필드공항에서 출발해 33시간30분을 날아 프랑스 파리 루브르제공항에 도착했다. 린드버그를 태운 비행기가 착륙하자 공항에 있던 시민 15만명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린드버그는 세계인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린드버그의 성공은 비행기 시대의 시작을 알린 예광탄이었다. 비행기의 등장이 야기한 변화, 그 핵심은 최근 출간된 ‘플레인 센스(Plane Sense)’에 담긴 이런 글을 옮기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다. “비행기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지구를 관념이 아니라 실체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오밀조밀 성냥갑처럼 붙어 있는 아파트 건물을 내려다보면 저 작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등바등 다투던 어제의 내 모습이 마치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처럼 객관화된다.”


인류 비행사에 남겨진 얼룩들

스웨덴의 의사이자 통계학자인 한나 로슬링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쓴 저서 ‘팩트풀니스’에서 “인간 협력의 눈부신 사례”로 ‘시카고 조약’을 첫손에 꼽았다. 이 조약은 지구촌 항공 부서 관계자들이 1944년 미국 시카고에 모여 비행기의 안전성 제고를 위해 항공 관련 공통 규칙에 합의한 것을 가리킨다. 실제로 이때부터 비행기는 안전한 운송 수단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16년 기준 지구촌엔 1년간 여객기가 4000만번이나 뜨고 내렸는데, 치명적 사고를 일으킨 비행기는 10대밖에 없었다. 사고 확률을 따지자면 0.000025%였다.

물론 시카고 조약만이 비행기의 안전성을 끌어올린 건 아닐 것이다. 인류는 지난 100여년간 엄청난 비행 사고들을 겪었고 수많은 승객이 비명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때마다 인류는 갖가지 재발 방지 규정을 만들었다. 온갖 안전 수칙을 제정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연방항공국엔 이런 말까지 있다고 한다. “모든 비행 규정은 피로 쓰였다.”

‘플레인 센스’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이야기도 바로 인류 비행사에 선명한 흉터를 남긴 사건·사고들을 개괄한 부분이다. 비행기 납치를 의미하는 ‘하이재킹(hijacking)’, 그 이야기를 다룬 첫 챕터부터 가독성이 상당하다. 여기선 국내 사건 하나만 살펴보도록 하자.

때는 1971년,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김상태는 탄광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그는 직접 만든 폭탄 4개를 들고 속초에서 김포로 향하는 여객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홍천 상공을 지날 때쯤 그는 객실 바닥과 조종실 문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조종실로 들어가 “당장 북한으로 기수를 돌려라”고 요구했다. 다행히도 기장은 이때 기지를 발휘했다. 공군의 F-5 전투기가 여객기를 에워싸자 저 전투기들은 소련제 미그기라고 둘러댔다. 그사이 객실승무원은 거짓 방송을 내보냈다. “지금 북한 영공으로 들어왔습니다. 북한에 착륙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가지고 있는 신분증을 지금 모두 찢어버리십시오.”

객실 분위기가 혼란해지자 보안 승무원이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권총을 뽑아 김상태를 사살했다. 그가 들고 있던 폭탄은 바닥에 떨어졌는데, 부기장이 몸을 날려 폭탄을 끌어안았다. 치명상을 입은 부기장은 서울로 이송되는 구급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는 이 책을 한가득 채운 기막힌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다. 책에는 기함할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2009년 프랑스 여객기는 과냉각(0도 이하에서도 얼음이 되지 않고 액체 상태로 남아 있는 상태) 적란운 속으로 들어갔다가 비행기가 통째로 얼어버려 탑승객 228명이 전원 사망했다” “최근 70년 동안 비행기 바퀴가 들고 나는 ‘랜딩기어베이’에 숨어 밀항을 시도한 사람은 공식 집계 인원만 113명이나 된다” “기내 화재를 17분 이내에 진화하지 못한 비행기는 모두 추락했다”….

야간비행을 할 때 조종실에 있는 계기판 ‘백라이트’가 모두 켜져 있는 상태. 만약 기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때론 저들 백라이트가 모두 꺼지면서 조종사들은 칠흑 같은 어둠을 마주하게 된다. 웨일북 제공

비행기, 얼마나 아십니까

이쯤 되면 ‘플레인 센스’를 이런 신간으로 규정하기 쉽다. 지난 100여년간 벌어진 특이한 비행 사고를 일별한 책일 거라고. 하지만 ‘플레인 센스’는 이런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비행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여객기의 구조를 세세하게 그려내고, 비행기의 기종별 특징을 자세하게 분석한 글까지 등장한다. 여기에 저자의 경험담까지 가미돼 있다.

책을 펴낸 김동현은 199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2018년 총 비행시간 1만 시간을 돌파한 베테랑 조종사다. 대한항공 수석 기장인 그는 지난 20여년간 틈날 때마다 각종 사고 보고서들을 틈틈이 읽었다. ‘플레인 센스’는 그의 20여년 공부 흔적이 담긴 작품인 셈이다.

과거 조종사들은 별을 보며 방향을 가늠했고 폭풍우를 피해가며 대양을 건넜다. 그러나 GPS로 대표되는 기술의 발전은 “비행의 속성”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저자는 “비행이 자동화되는 것이 조종사에게 생각하고 분석하는 습관과 능력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창밖을 보라(When in doubt, Look outside)”는 격언을 소개하면서 이런 말까지 덧붙인다. “비행은 화면 속의 비디오 게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자연과 대면하는 현실이다. …조종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하며, 그런 부단한 노력만이 자연의 우연성을 상대로 승객의 절대 안전을 지켜낼 수 있다.”

일반인이 굳이 비행의 원리나 기술까지 알아야 할까 의구심도 생기는데,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낯설어서 재밌는 이야기가 이 책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책을 읽고 나면 “항공 여행 중 이따금 겪었던 지루한 순간들이 의미 있고 흥미로운 경험”으로 바뀔 듯하다. 물론 당분간은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게 언감생심이겠지만 말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