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가난은 구경의 대상이 아니다

입력 2020-06-04 21:06 수정 2021-11-04 16:49
‘가난 사파리’는 2017년 6월 영국 런던 빈민가 아파트 그렌펠타워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저자는 72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가난을 구경거리로 삼는 ‘가난 사파리’였다고 말한다. 사진은 화재 당시 화염에 휩싸인 렌펠타워. AP뉴시스

김숨 작가를 생각하면 뽑혀진 뿌리 이미지부터 떠오른다. 작가와 뿌리를 거의 동일시하게 된 건 2014년 발표된 단편소설 ‘뿌리 이야기’를 읽은 직후였다. ‘뿌리 이야기’는 단풍나무 뿌리, 포도나무 뿌리, 복숭아나무 뿌리 등 수많은 뿌리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도감이 아니므로 화자는 뿌리에 대한 디테일을 재현하는 대신 뿌리 뽑힌 나무의 고통을 상상한다.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가 들릴 때 나무들은 공포를 느낄까?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는 땅이 삽이나 곡괭이질에 파헤쳐질 때 나무들은 가위에 눌릴 것처럼 공포에 떨까?”

나무가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한 사실 확인은 중요하지 않다. 나무는 뿌리 내린 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뿌리가 뽑힐 때 나무의 고통을 상상한다는 것은 뿌리 뽑힌 사람들, 그러니까 살던 곳에서 쫓겨난 철거민이나 친부모를 알지 못하는 입양아, 혹은 먼 길을 돌아 겨우 도착했으나 끝내 정착하지 못한 어느 위안부 피해자처럼 자리에서 추출된 사람들이 느낄 공포와 슬픔을 상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문학의 동사는 ‘상상하다’ 이외 다른 것일 수 없다.

김숨의 신작 소설 ‘떠도는 땅’은 ‘뿌리 이야기’의 확장판이자 결정판이다. ‘뿌리 이야기’가 뿌리 내리지 못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의 이지러진 표정에 다가가는 소설이라면 ‘떠도는 땅’은 뿌리를 아예 잘라 버린 폭력에 대한 소설이다. 정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거주 이동의 명령은 이들의 인생에 더 이상 어떤 뿌리도 허락되지 않을 거라는 최후통첩이다. 150년 전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던 고려인들의 목소리가 온갖 불쾌한 냄새와 촉감들 위로 흐를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비참함만이 아니라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존재론적 절망이다.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던 것도 절망이었다.


서효인 시인의 말처럼 김숨이 모멸의 시간을 버티며 살아내는 장르에 있어 탁월한 작가이자 위대한 작가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건 모멸의 당사자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일체의 대상화가 깃들지 않아서일 테다. ‘떠도는 땅’을 읽고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를 떠올린 건 대상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의 태도가 김숨의 시선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난 사파리에 누군가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일이 끔찍하리만치 무신경하게 이뤄진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래퍼이자 활동가인 맥가비는 성난 군중의 선두에 선 작가다. 가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규정하는 그의 글은 계급에 대한 논쟁에 종종 불씨를 던진다.

예컨대 그는 ‘글래스고 효과’라 불리는 ‘행동 연구 프로젝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년 동안 글래스고 지역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한 미술가의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이 퍼포먼스는 지속가능한 실천의 한계를 시험하는 동시에 지역의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가난이란 여러 가지 불평등이 중첩된 억압적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이 프로젝트를 반겼을 리 없다. 맥가비에게 ‘글래스고 효과’는 지역 사람들이 처한 삶의 조건을 일반화함으로써 가난을 단순화하고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사파리 동물처럼 가난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난 사파리’의 미덕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시간이 지나 ‘글래스고 효과’를 재평가하며 노동 계급을 대변하는 논객으로서 자신 역시 가난을 전형화된 틀에 맞춰 이용하고 있었음을 인식한다. “채식주의, 자전거, 건강식 등 중간계급의 삶을 특징짓는 이런 짜증나는 것들”에서 그간 외면했던 실용적인 기능과 진정성을 발견한 그는 당사자로서 자신마저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사파리는 동물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자유를 구경하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쉬지 않고 묻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일 것이다. 맥가비가 당사자인 자신마저 의심하듯이 우리에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할 줄로 믿는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