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이 갖는 놀라운 힘이 있다. 부정이 갖는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가나안 땅에 보내진 정탐꾼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파별로 12명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잘 이뤄갈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그 부정적인 보고는 이스라엘 전체를 통곡하게 했다. 민수기 14장 1절에 보면 정탐꾼들의 보고가 있고 난 뒤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부정의 힘이다.
사실 이들의 보고는 정확한 것이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으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습니다.”
정확한 그들의 말은 하룻밤 사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통곡하게 했고, 그 결과 20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의 광야 훈련을 덤으로 받아야만 했다. 리더 10명의 불신앙이 200만명의 이스라엘이 불필요한 훈련을 받게 만든 것이다.
똑같은 상황을 봤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본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다.
그들의 말은 노만 필(Norman Peale)이 말하는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단순한 긍정의 말이 아니었다. 믿음의 말이었다. 사실 부정의 반대는 긍정이 아니라 믿음이 돼야 한다. 아무리 긍정의 말을 해도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불가능한 일이 된다.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도, 주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것을 믿고 있으면 정말로 말씀하신 대로 된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부정을 부정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부정을 긍정이라고 말하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정을 보기 전에, 부정을 말하기 전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먼저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문제 붙들고 밤새 씨름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걱정과 한숨만 는다. 대신 약속의 주님을 볼 때 주께서 이루심을 확신케 된다. 실망과 좌절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도 말씀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문제만 자꾸 들여다보지 말고, 예수님께 시각을 고정하라는 말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주시고 믿음이 자라게 하는 믿음의 주인(author)이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분(perfecter)이시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신학적 토대를 세웠던 어거스틴이 그랬고, 타락한 중세의 기독교를 변혁시켰던 마르틴 루터가 그랬다. 수백 년간 아프리카 흑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미국이 진정한 기독교 국가가 되게 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랬다.
시대를 바꾸고 시대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은 그저 머리 좋고 실력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성실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 실력은 조금 부족해도, 준비는 조금 덜 됐어도 끝까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
(미국 워싱턴 휄로십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