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입력 2020-06-04 19:52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날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 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 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척이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세요

고두현의 ‘남해, 바다를 걷다’ 중

경남 남해 바닷가에 앉아 시인은 저 멀리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세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이라고,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옷을 벗는다고, 저 멀리 파도는 “몸이 달아 뒤척이는” 모습이라고 노래한다. 시를 읽으면 작품의 배경이 됐을 남해 물미해안에 가고 싶어진다. 망연하게 앉아 해 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을 것 같다. 시집은 시인이 그간 남해를 테마로 쓴 작품을 모은 ‘남해 시 선집’으로, 그는 책의 첫머리에 이런 글을 적어 두었다. “남해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내 다시 보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