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세상의 소금과 빛

입력 2020-06-03 00:0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매우 유명한 선언이다. 우리는 이 선언에 비춰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우리가 소금과 빛처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선언이 제자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나 빛이 “돼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러한 존재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나선 제자들의 존재나 가치가 이미 그러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해내야만 가치 있게 된다는 질서에 익숙하다. 그래서 기독교조차 쉽게 율법주의 신앙으로 변질된다. 무언가를 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신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다. 정체성이란 열심히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짠맛을 열심히 내서 소금이 되고, 더 밝게 타올라서 빛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하늘나라 백성들이 이미 그러한 존재라고 예수님은 선언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정체성이 가진 함의다. 어떤 면에서는 ‘소금’이나 ‘빛’이라는 이미지보다 이것들을 수식하는 표현들이 더 중요하다.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땅의)’ 소금이라 하셨고, ‘세상의’ 빛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땅’과 ‘세상’은 ‘하늘’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 공간들은 하늘 하나님의 통치가 베풀어져야 하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선언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늘나라 백성들의 정체성이 나타나고 발휘되는 자리는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요, 이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소금의 가치는 홀로 있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소금은 그 특성상 타자를 위해 쓰일 때라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 바구니 안에 가둬놓은 등불은 아무리 밝게 타오른다 해도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등불이 밖으로 꺼내질 때 온 사방을 비춘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 백성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과 세상 속에서 그 정체성과 의미가 나타난다.

한 가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 선언이 ‘박해’라는 맥락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 땅과 이 세상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땅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에서 모욕을 받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거절과 핍박은 제자들을 움츠러들게 하고, 그래서 세상과 결별하고 우리끼리의 리그를 만들려 할지 모른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요 세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그들의 등을 떠미신다.

팀 켈러 목사는 그의 저서 ‘센터처치’에서 “그리스도인은 도시의 전체적인 유익을 위해 깊이 헌신된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작금의 상황은 교회가 이 사회와 분리돼 존재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교회가 사회 공공의 안녕에 깊은 관심을 가진 공동체가 돼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현재 우리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름을 받은 자리다. 그곳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가 나타난다. 그곳은 우리에게 불편한 자리일 수 있다. 환영보다는 조롱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속으로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내시며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말씀하신다.

송태근 목사(삼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