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다.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라디오에서 귀에 익숙한 음악이 피아노 연주로 들려 왔다. 연주자가 나와 직접 연주했는데, 뒷좌석에 탄 딸이 “지금 들리는 음악은 비틀스의 ‘렛잇비(Let it be)’”라며 아는 척을 했다. 내 귀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Yesterday)’로 들려 아니라고 교정해줬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내가 ‘렛잇비’가 맞다며 딸의 편을 들었다. 우리는 곡이 끝날 무렵 볼륨을 크게 틀고 디제이와 연주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예스터데이’와 ‘렛잇비’를 함께 편곡해 연주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알던 지식도 언제든 새로움이 더해져 전혀 다른 결과물로 나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리질 않는다. 그 가운데 미확인 정보가 사실인 양 전해지고, 각자 자신이 모은 정보를 토대로 나름의 논리를 펼쳐 SNS에는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상반된 주장이 유통되곤 한다.
문제는 내가 선호하는 사람이라거나 이전에 그 사람의 의견이 검증됐다는 전제 아래 무조건 한쪽의 입장을 신봉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는 점이다. 이전엔 맞았어도 이번엔 틀릴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갈수록 세상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다 보니 하나의 사안에도 변수와 고려할 점이 많아진다.
진리는 단순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선 복잡하고 모호한 것이 실체인 경우도 많다. 글이라면 명료한 논리가 읽기에 편하고 이해하기 좋을 수 있지만, 실제 현장에선 섣부른 단순화가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피해야 할 말이 있다. “그것 보라고. 내가 맞잖아”와 같은 말이다. 어떤 주장을 하고 기다렸다가 그 일이 자신의 주장대로 흘러가면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다 자신의 주장이 틀렸을 때는 침묵한다. 잘못을 시인하고 수정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타인의 오류에 대해서는 무자비하면서도 자신의 오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
세상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내야 하는 법정이 아니다. 무너진 곳은 복구하고, 방치된 곳은 쓸모를 찾아 활용하는 숲과 같은 곳이다. 코로나19처럼 자욱한 안개로 삶의 시야가 흐려져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간이 길어질수록 확신의 언어보다 겸손과 인내의 마음이 필요하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아픔과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라는 사회적 참사를 몇 개월 사이 연달아 경험했던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는 논리로 고통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췄다. 대신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세계를 인식했다.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이 서둘러 행복으로 도피하려는 태도보다 낫다고 고백했다.(책 ‘살아야 하는 이유’ 중)
지금 우리 모두 많이 힘들고 많이 아프다. 자신의 혜안을 과시하는 날 선 언어는 모두의 고통을 가중할 뿐이다. 태도를 가다듬어 서로를 지지해줄 때다. 방역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분들에겐 감사를, 주저앉지 않고 한 걸음씩이라도 앞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에게는 격려를, 고난의 긴 터널을 함께 지나도록 부름을 받은 모두를 위해선 기도를 드릴 때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성현 목사(필름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