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사라져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아”

입력 2020-06-01 04:01
‘행복 목욕탕’ 등 웰메이드 가족극으로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은 신예 나카노 료타 감독. 그가 4년 만에 공개한 신작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치매 아버지와 이별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가슴 따뜻하게 그린다. 월터미티컴퍼니 제공

나카노 료타(47) 감독은 단 두 작품만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두 영화 모두 가족극이었다. ‘캡처링 대디’(2013)로 데뷔한 그는 상업영화 데뷔작 ‘행복 목욕탕’으로 일본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석권했고, 국내에서도 입소문을 탔다. 담백한 가족 이야기로 팬층이 탄탄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비견되며 ‘포스트 히로카즈’라는 애칭도 얻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지난 2018년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나카노 감독이 선택한 이야기 역시 가족극이다. 국내에서 지난 27일 개봉한 ‘조금씩, 천천히 안녕’이다. 나카노 감독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내게 가족은 구원이자 희망이고, 삶의 의미”라며 “가족이 절망뿐 아니라 희망의 씨앗도 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감독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영화 중심에 놓이는 이야기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쇼헤이(야마자키 쓰토무)와 7년에 걸쳐 이별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모습이다. 아내 요코(마쓰바라 지에코)와 큰딸 마리(다케우치 유코), 둘째 딸 후미(아오이 유우)는 명철했던 쇼헤이가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위로를 얻는다.

최루성 신파 없이 시종일관 전해지는 따뜻함이 영화의 큰 장점이다. 치매 환자가 있는 가족은 괴롭다는 고정관념을 흔들고 싶었다는 나카노 감독은 “치매로 뇌가 망가지는 건 몇 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변하지 않는다.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게 괴롭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실은 가족들도 환자에게 때로 위로를 얻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일본 소설가 나카지마 교코의 ‘긴 이별’이 영화의 원작이다. 앞선 작품에서 오리지널 각본을 고집해왔던 나카노 감독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는 “어릴 적 할머니가 치매를 앓으셨던 터라 마음이 더 움직였다”며 “아버지의 치매를 다루면서도 가족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함께 담아낸다는 점에 반했다”고 전했다.

대신 원작을 조금 더 간결하게 전하기 위해 세 자매를 두 자매로 바꾸는 등 각색을 덧댔다. 덕분에 128분의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간다. 일본 대표 배우들의 호연도 매력적이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소재 영화도 구상해보고 있다는 나카노 감독은 “향후 제작할 영화에서도 ‘가족’이 기본 베이스일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시대적 문제를 성찰하고 ‘엔터테인먼트’를 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영화 등 문화 콘텐츠 교류가 경색된 한·일 관계에 물꼬를 터줄 것이라고도 믿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등 한국 영화 애호가로도 잘 알려진 나카노 감독은 “나라와 언어, 역사의 벽을 넘어 이해의 지반을 마련해주는 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