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내 것을 다 퍼주고 속 깊은 얘기도 다 터놓았지만 조금이라도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거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수 사이가 됐다. 마음은 점점 뒤틀려져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지 못하고 꼬여가니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이었고 친해지기까지 굉장히 어려웠다. 그러다가 큰 새언니를 통해 나도 교회를 나가게 됐고 교회에서 한 형제를 만나 결혼도 했다.
결혼 초부터 남편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해주었다. 나는 점점 남편바라기가 돼 갔다. 아이가 생긴 후로는 뭐든지 남편에게 의지했고, 남편의 말이나 행동이 조금만 거슬려도 불만과 서운함으로 늘 힘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첫아이가 저체중아로 태어나 하루가 멀다하고 아프니 다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더 예민해졌고 나는 불만 덩어리가 돼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사는 지경이 됐다.
너무 답답한 마음이 들어 고민하다가 무슨 용기인지 혼자 새벽기도를 가게 됐다. 그날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 그 순간 마음에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사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해졌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생각하셨겠지….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오셨으니까. 그럼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뭘 알려주고 싶으셨을까.’ 그때 ‘부활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썩지 않는 몸, 영원히 사는 몸, 신령한 몸. 이것을 생각하는데 그 순간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부활체로 내 앞에 서 계신 것 같았다. 나를 향해 예수님께서 호통치시는 것 같았다.
“죽었다가 다시 살면 어떡할래!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면 어떡할래! 그땐 어떡할래!”
나는 예수님의 간절한 호통 앞에 그대로 무너졌다.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상관없이 살던 사람이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친히 그 몸으로 다시 사신 것을 보여주셨는데도 부활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조롱하던 자가 나였다. 잘못했다고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남편과 아이의 주인 노릇하며 꽉 쥐고 있음을 알게 됐다. 아이에게 잘 해준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아이를 움켜쥐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그저 눈물만 나왔다. 남편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막 대했던 그 악한 중심이 보이니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나의 죄를 알게 되고 예수님께 진심으로 굴복하니 그 뒤에 오는 자유함은 그야말로 세상에선 절대 맛볼 수 없는 자유함이었다. 아이도, 남편도, 물질도 모두 주님께 맡기니 정말 사는 게 단순하고 가벼워졌다.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나 같은 사람도 복음으로 변한다는 확신이 드니 세상에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예수님을 그냥 막 전하게 됐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이면 다 된다고, 나같은 사람도 변했다고 얘기하고 다녔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파도가 밀려왔고 또 그럴테지만 부활의 증거를 통해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언제나 꺾어진 무릎을 다시금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을 경험한다.
불만덩어리였던 나를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과 공동체를 위해 살 수 있는 삶으로 인도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홍채빈 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