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원격의료 확대, 주사위는 던져졌다

입력 2020-05-28 04:01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50대 암환자 이야기다. 경남 창원에 사는 그는 작년 2월 수도권의 한 대형병원에서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선 6개월에 한 번씩 올라와 갑상선호르몬약을 처방받아 왔다. 지난 4월에도 다른 검사를 받을 필요없이 호르몬제만 타서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병원 방문이 꺼려졌다. 면역력 약한 암환자는 병원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병원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니 ‘전화 상담·처방도 가능하다’고 했다. 주치의와 통화한 뒤 먼길 갈 필요없이 팩스로 집 근처 약국에 보내진 의사 처방전으로 약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19 유행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국내 처음으로 허용된 원격진료의 모습이다. 감염 위험 부담을 덜었다는 점에서 환자와 병원 모두에 분명 도움이 된 듯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전국에서 이뤄진 전화 상담·처방은 26만2000여건에 달한다. 대부분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자나 가벼운 감기 환자, 재진(再診) 환자들이 대상이다. 전화 상담·진료에 따른 오진 등 부작용 보고는 없었다는 게 보건 당국의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원격진료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으로 가능하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거나 종식되면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원격의료 범주에서 의사와 환자 간에 이뤄지는 원격진료와 원격모니터링은 현행 의료법상 금지돼 있다. 다만 의사와 의사·간호사 간 원격자문 형태는 지금도 허용돼 있다.

도서·산간 등 취약지 의료 접근성 확대,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감소, 신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원격의료 확대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관련 의료법 개정도 10년간 세 차례 시도됐지만 의료계의 반대에 부닥쳐 불발됐다. 대한의사협회는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여건 미성숙과 부작용 발생 시 법적 책임 문제, 대형병원 환자 쏠림 등을 이유로 전면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시민단체는 의료 영리화 프레임을 들이댄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몰아닥친 신종 감염병이 한국 사회의 해묵은 논쟁을 다시 불러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포스트 코로나 사회의 뉴노멀(새로운 표준)로 비대면 의료 서비스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운을 띄웠고 새로 출범할 21대 국회에서 본격 논의될 가능성이 커졌다.

의사협회는 또다시 강력한 반대 투쟁을 천명했다. 하지만 과거 원격의료 추진 때와 환경이 많이 달라졌음을 의사단체는 알아야 한다. 의료 소비자인 국민은 물론 일부 의사들도 원격의료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최근 경기연구원이 시행한 전국 거주 1500명 대상 조사에서 응답자의 88.3%가 원격의료에 찬성을 표시했다. 의사협회의 주류인 동네 개원의사들 중에서도 일부 긍정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의료계의 또 다른 축인 병원협회도 코로나19가 원격의료 전면 도입의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협회가 무조건 반대 입장만 고수할 게 아니라고 본다. 병원협회, 정부, 소비자(환자)단체와 함께 진지한 논의에 선제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의·병·정(醫病政), 환자단체가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혹은 합의) 기구를 구성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계속 금지하느냐, 허용하느냐를 포함해 한국 의료 시스템에 맞는 모델이 어떤 건지, 의료계가 걱정하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안은 무엇인지 등을 의제로 삼을 수 있다.

협의체에선 각자 입장만 고집해서는 생산적 결과를 도출하기 힘들다. 최근 협상학에서 뜨는 개념 중에 ‘배트나’(BATNA: Best Alternative Negotiated Agreement)란 게 있다. 협상이 결렬될 경우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을 준비하고 또 다른 대안이 있음을 알려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것이다. 원격의료 확대 논의에도 배트나 전략이 필요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비대면 의료는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