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공부가 주는 작은 기쁨 맛깔나게 담아

입력 2020-05-28 20:52

영어권 국가에서는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차일드 프리 존(child-free zone)’ 정도로 부를 뿐이다. 노키즈존은 콩글리시다. 언젠가부터 국내엔 많은 곳이 노키즈존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지난해엔 아이들이 즐기는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 상영관 일부도 노키즈존으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저자는 이 현상을 “음미해볼 만한 역설”이라고 규정하면서 “세계 최저 출산율을 자랑하고 노키즈존 개념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져 가장 활성화된 나라답다”라고 비꼰다. 그러면서 아나그램(anagram)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listen/silent’처럼 글자 순서를 약간 바꾸면 유의어나 반의어 같은 “색다른 연결”이 나오는 게 아나그램이다.

저자는 소개하는 문장은 “No Kids are Koreans’ ID”다. “한국인의 정체성(ID)에 아이는 없다”는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한데 쉼표 하나를 찍으면 뜻이 달라진다. “No, Kids are Koreans’ ID.” 아이들이야말로 한국인의 중요한 정체성이라는 뜻이다. 저자가 이다음 덧붙인 글은 다음과 같다. “쉼표 하나만 찍으면 뜻이 정반대로 뒤바뀐다. …갈 데까지 가다가 ‘쉴 데’와 ‘쉴 때’를 놓치기 십상인 많은 한국인의 삶에 쉼표가 언제 찍힐지 자못 궁금하다.”

싱거운 농담처럼, 혹은 절묘한 언어유희처럼 들리는 저런 글은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 곳곳에 실려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지점은 저자의 이력. ‘언어의 우주에서…’을 쓴 신견식(47)은 자신을 “어도락가(語道樂家)”라고 소개한다. 그는 15개 넘는 외국어를 익히고 25개 언어를 우리말로 옮긴 적 있는 번역가다. 그런데 저자는 유학이나 어학연수 경험이 없다고 한다. 학원에 열심히 다닌 적도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외국어 공부의 비법을 전하는 그렇고 그런 자기계발서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

‘언어의 우주에서…’은 외국어 공부를 통해 “삶의 작은 기쁨”을 느꼈노라 고백하는 중년 남성의 에세이다. 저자는 “여행을 떠나야 평소 숨어 있던 스스로의 본모습이 보이듯 외국어의 별미 사이에서 한국어의 진미도 더욱 입에 감긴다”고 말한다. “여러 언어의 이런저런 유사점과 차이점을 맛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도 적어놓았다. 타고난 어도락가의 이색적인 삶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인 셈인데, 초반부에서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소개해 놓았다. “번역을 하면서도 얽히고설킨 언어들의 뿌리를 캐다가 삼천포로 안 빠지고는 못 배긴다. 이 책은 그 삼천포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