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모멸의 시간을 버텨 살아 내는 삶

입력 2020-05-28 20:54 수정 2021-11-04 16:49
강제 이주 열차에 탑승한 고려인 이야기를 다룬 소설 ‘떠도는 땅’을 출간한 소설가 김숨. 김숨은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이듬해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철’ ‘바느질하는 여자’ ‘L의 운동화’ ‘간과 쓸개’ 등이 있다. ⓒ김흥구

소설을 읽을 때는 아무래도 태평한 인물보다는 발버둥 치는 인물에 정이 간다. 김유담의 소설 ‘탬버린’의 주인공 은수도 그랬다. 생애 가장 절박한 순간에 그는 10대 시절의 무기력과 권태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준 탬버린 아니, 탬버린을 잘 치던 친구를 기억한다. 팀 간 묘한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내 회식, 대표는 노래방 점수 100점을 맞은 이에게 상금으로 5만원을 준다.

은수는 탬버린 주법을 가르쳐주던 친구를 떠올리며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야속하게도 노래방 기기에 찍힌 숫자는 99점이거나 97점이다. 대표는 그깟 노래방 점수에 젊은이의 열정은 운운하며 은수를 밀어붙인다. 은수는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거의 빌다시피 하는 눈빛으로 그를 응원하는 선배들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탬버린을 두고, 두 손으로 기도를 하듯 마이크를 쥔다. 은수는 100점을 맞을 수 있을까? 그 시절 친구들은 지금 어디쯤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은 공히 떠도는 인간들이다.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채, 불안한 자세로 삶에 최선을 다한다.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밀려들어 왔거나, 임대아파트에서 연립주택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사람들이다. 추천사의 말마따나 그건 “모멸의 시간을 넘겨 버텨서 살아 내는 일”이다. 소설이 결국 ‘모멸의 시간’과 ‘버티는 삶’의 형상화라면 ‘탬버린’은 2020년의 우리를, 그중에서도 여성 청년을 가장 잘 다루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 배경과 입체적인 인물, 그것을 아우르는 시대적 맥락이 작품마다 촘촘하게 엮여 있다. 그 엮음의 무늬는 ‘탬버린’이나 ‘볼링’ ‘공설운동장’ ‘뉴질랜드 산 양모 이불’ ‘찻잔 세트’와 같은 구체적 사물의 모양이 되어, 심미적인 안정감을 준다. 이것은 내 이야기다, 이 모두는 우리의 이야기다, 와 같은 마음을 들게 한다.


신인 작가의 유려하고 단정한 작품에 이어 읽을 소설로 김숨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떠도는 땅’을 골랐다. 소설은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를 배경으로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소설에 대한 불성실이겠다. ‘떠도는 땅’의 배경은 소설의 주제이자 거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곳은 고려인 몇 가족이 탄 화물열차 한 칸이다. ‘화물열차’라는 정보가 알려주는 바, 그들은 이주가 결정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사람으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이유도, 목적지도, 다른 가족의 행방도 알지 못한 채 해가 들어오지 않는 화물칸에 실려 그들은 하염없이 간다. 아니, 가지 못한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채로 어딘가로 끌려가는 아이러니에서 그들은 이야기한다. 말을 하고 말을 듣는다. 집에 두고 온 닭과 돼지, 가까스로 챙겨온 말린 생선과 소시지에서부터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와 그들의 고향은 물론이고 소비에트와 러시아인에 대한 것과 혼돈스러운 정체성 그리고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리듬을 희미하지만 분명한 리듬으로 이어진다.

단정한 문장과 친숙한 현대어로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몇 페이지는 읽는 이를 약간 당혹스럽게 한다. 이 말은 누구의 말인지, 누가 누굴 향해 발화하는 것인지 다른 소설만큼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 이 리듬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잠자코 그들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시커먼 열차에 앉아 한 계절 동안 러시아 대륙을 지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이 작가가 부리는 마법의 순간이자, 소설이라는 장르의 마술적 힘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에는 ‘마법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현학이 없다. 땅 위의 리얼리즘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새로운 땅에서의 남은 시간을 걸머진다.

그리고 150년의 시간이 지났다. 일제 강점의 한반도를 떠나 연해주에 자리했던 그들은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곳곳의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거칠고 마른 땅에 스미어 그들의 문화를 일구고 혹독한 삶의 시험을 버텨 냈다. 다시 한번, 소설이 모멸의 시간을 버텨 살아 내는 일을 그리는 장르라고 한다면, ‘떠도는 땅’은 소설의 전범이 될 수밖에 없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