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판, 정의입니까 복종입니까” 이재용사건, 특검의 항변

입력 2020-05-22 00:15
연합뉴스

“법치주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재판이 되느냐, 아니면 거대 자본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재판이 되느냐. 이 여부는 이 사건 재항고 인용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박영수특검은 지난 18일 대법원에 제출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장 기피신청 재항고이유서에 이렇게 적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검은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범행을 ‘대통령과 국내 최대 재벌 총수 간의 뇌물수수’로 규정해 왔다. 역사로 남을 재판인 만큼 불공평한 진행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특검의 한결같은 기피신청 이유였다.

특검은 정준영 서울고법 형사1부장판사의 재판이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취지마저 거스르는 식으로 진행돼 왔다고 대법원에 호소했다. 대법원에서 이미 깨진 이 부회장의 ‘강요죄 피해자’ 프레임에 정 부장판사가 갇혀 있다는 주장이었다. 지난해 대법원은 국정농단 사건 핵심들의 상고심 판결을 선고하며 ‘삼성 승계작업에 대한 부정한 청탁’이 존재했다고 봤고, 이 부회장의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 뇌물 공여’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 부회장 측은 ‘겁박의 피해자’로서 뇌물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정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공판에서 “피고인 측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거절할 수 없는 요구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며 “그렇다고 한다면 향후 정치권력자로부터 똑같은 요구를 받을 경우 또 뇌물을 공여할 것인지”를 물었다. 특검은 정 부장판사가 ‘그렇다고 한다면’이라 전제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이다. 대법원 판시에 비춰 보면 애초 고려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특검은 이 부회장의 주장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입장이다.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기업총수가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건 20여년 전인 1997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노태우 전 대통령 뇌물공여 사건 당시 이미 대법원에서 배척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인 전원이 이 부회장을 ‘대통령의 요구에 편승해 직무 관련 이익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뇌물을 제공한 자’로 판단했다.

정 부장판사가 지난해 10월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첫 공판기일에서 쏟아낸 이례적 발언도 재항고의 이유로 적혔다. 대법원 판단과 달리 이 부회장을 삼성그룹과 동일시한 그릇된 인식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정 부장판사는 “몇 가지 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삼성그룹이’ 이 사건과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 못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삼성전자를 업무상횡령의 피해회사이자 뇌물 처분에 이용당한 도구로, 이 부회장은 업무상횡령범이자 범죄수익 가장범으로 명확히 구분해 판시했었다. 특검은 정 부장판사가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꺼내 읽은 것에도 주목했다. 말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95페이지 분량의 재항고이유서에는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분 취득 경위가 도표로 실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이 1994년 10월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증여받은 돈으로 매수한 23억원어치 에스원 주식이 삼성그룹 미전실의 ‘작업’ 속에서 7조원대로 늘어난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특검은 재판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할 것은 준법감시위원회 설치가 아니라 이 부회장이 ‘최소 비용’으로 삼성그룹 지배력을 극대화한 배경이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특검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수사를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부장검사 이복현)와도 의견을 교환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구자창 이경원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