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K-컬처의 이면, 조선 풍속화에서 서양이 본 것은…

입력 2020-05-24 20:11
김홍도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 풍속화는 18세기 정조 때 전성기를 누리다 그의 사후 쇠락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중엽 개항 이후 서양인이 찾으면서 다시 인기를 누렸고, 그 중심에 기산 김준근이 있었다. 사진은 김준근의 ‘포청에서 적토 받고’(①),‘망근장이’(②), ‘신부 신랑 초례하는 모양’(③), 김홍도의 ‘노상풍경’(④) . 국립민속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포승줄에 꽁꽁 묶인 초록 옷의 죄인. 포졸 2명이 양 옆에 서서 그의 두 다리 사이로 막대기를 X자로 넣어 주리를 틀고 있다. 죄인 뒤편에도 포졸 한 명이 서서 뒤로 묶인 손에 1자 형태로 막대기를 넣었다. 고문이 고통스러워도 몸부림치는 것도 어렵게 만든 이 형벌 장면은 조선의 야만성을 생생히 보여준다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 이는 기산 김준근(생몰연도 미상)이다. 19세기 제물포, 부산, 원산 등 개항장을 떠돌며 그림을 그렸던 상업 화가였다. 유독 서양인들이 그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번역된 서양 문학작품 ‘텬로력뎡(천로역정)’에 삽화를 그린 이도 김준근이다. 주문자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에드워드 마이어(1841~1926). 조선 정부로부터 독일 주재 조선국총영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1884년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냈던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제물포에 한국 첫 독일회사인 세창양행을 설립했던 사업가였다.

마이어는 이 그림을 포함해 김준근에게 주문한 조선의 풍속화 61점을 고향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현 MARKK)에 보냈다. MARKK 소장 김준근 풍속화 총 79점이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을 뚫고 한국에 왔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전(10월 5일까지)을 통해 대중에게 인사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상하다. 18세기 풍속화에선 볼 수 없던 장면들이 있다. 형벌 장면이 대표적이다. 여기엔 조선을 야만적인 전근대 국가로 보는 서양의 우월적 시선이 담겨 있다. 일명 ‘수출화’로 불리는 김준근 풍속화에는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의 변화된 사회상도 담겼다. 망건과 가죽신을 제작하는 모습, 가마점 등의 수공업 현장은 18세기 풍속화에는 없던 것들이다. 물론 그 때까지 변함없는 조선 풍속인 길쌈, 결혼, 그네, 장기두기 등도 특유의 총천연색 그림에 담았다. 인기가 높아 공방 제작 형식을 빌려 같은 장면을 여러 점 그리기도 했다.

마이어는 왜 김준근 풍속화를 수집해 함부르크민족박물관에 넘겼을까.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은 막 개방한 조선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다. 텅 빈 유리진열장을 채워줄 조선 민속품을 수집해달라고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풍속화 외에도 조선의 모자, 무기, 농기구, 의복 등도 수집해 보냈다. 마이어는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의 ‘원격 컬렉터’였던 셈이다.

수출화의 아이콘 같은 김준근의 풍속화는 미지의 나라 조선을 알고자 하는 서양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네덜란드 국립라이덴박물관,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프랑스 기메 동양박물관 등 국내외 17곳에 약 1500점 소장돼 있는데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다. 서양인에게 인기 있었지만, 그 이면엔 조선을 낮춰보는 ‘19세기 K-컬처’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김준근 전시는 국내에서는 7년만이다. 2013년 갤러리현대의 ‘옛 사람의 삶과 풍류-조선시대 풍속화’ 전이 열렸다. ‘시장’ ‘촌가여막’ 등 수묵 풍속화는 그 때 볼 수 없던 것들이다. 4월 29일에야 작품이 공수된 탓인지 20일 만에 급박하게 준비한 인상이 짙다. 김준근의 작품을 민속의 관점에서만 나열했을 뿐이다. 그가 왜 서양인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18세기 풍속화와는 무엇이 다른지 등 맥락은 빠져 있다.

다행히 발품을 팔면 18세기 풍속화의 정수를 만나 비교 감상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김홍도(1745∼1806)의 ‘단원풍속도첩’(보물 527호)을 상설전시관 서화실에서 공개한다. 이 화첩은 김홍도가 일상생활을 스냅 사진 찍듯이 포착한 25점으로 꾸려졌다. 이 가운데 ‘씨름’ ‘무동’ 등 7점이나 펼쳐 놓는다. ‘그림감상’ ‘노상풍경’ 등 자주 노출되지 않은 그림이 나와 반갑다. 30일까지라 서둘러야 한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