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① 당신의 ‘잊힐 권리’를 위해서
② ‘n번방’, 두 번은 없어야 한다
③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2018년 12월 대구시내 한복판에서 남성 이모(당시 29세)씨가 A양(16)을 성폭행했다. 인근 대형마트 주차장과 모텔을 돌아다니며 범죄를 저질렀는데 A양은 반항하지 않았다. ‘조건만남’이었을까. 검거된 이씨는 뜻밖의 진술을 했다. 랜덤채팅앱(랜챗)에서 만난 ‘성명 불상자’로부터 “여고생을 만나볼 생각 있느냐, 내 ‘노예’인데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조건은 영상을 촬영해 보내는 것뿐이었다. 이씨가 전송한 영상은 곧 온라인에 떠돌았다. 그곳이 텔레그램 ‘n번방’이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지금까지 판결문에 ‘성명 불상자’로 적혀 있던 그는 ‘갓갓’ 문형욱(25·구속)씨였다. 사건의 퍼즐은 지난 9일 문씨의 자백으로 맞춰졌다.
지금까지 문씨가 만든 n번방 피해자는 10~20명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모두 50명 정도”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피해자 대부분은 미성년자로 파악됐다. 실제로 아동·청소년은 여러 성범죄에 노출되기 쉽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파악된 디지털 성범죄 관련 피해자 중 절반은 10대였다. 온라인을 통한 가해 수법이 고도화되는 상황에서 심리 방어 기제가 낮은 미성년자의 경우 성매매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모든 유형의 성범죄로부터 아동·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 마련된다.
지금까지 성매매에 유입됐던 아동·청소년은 피의자로 구분돼 처벌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피해자 지위를 부여한다. 지난달 29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데 따른 것이다. 개정안은 성범죄에 노출되고도 보호 사각지대에 놓이는 미성년자가 없도록, 궁극적으로 모든 청소년이 국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여성가족부는 이번 조치로 청소년이 성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에 한 발짝 다가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동안 성매매 유입 미성년자들은 제대로 신고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을 악용한 가해자들로부터 추가 피해를 봤다. 여가부는 성매매에 유입된 미성년자들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의료·법률, 심리, 자활, 교육 등 보호체계를 운영하기로 했다. 여가부 아동청소년성보호과는 “성매매에 유입된 미성년자를 소년원에 보내야 하는 사례도 꽤 있었다”며 “아이들이 피의자 취급을 받기 때문에 더욱 신고할 수 없게 됐고 성매수자는 이를 노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매매 유입 미성년자도 성폭력 피해자들이 받는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며 “처분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아동·청소년을 성범죄로 유인하던 랜챗 단속도 시작된다. 실명·휴대전화 인증, 대화 저장, 신고 기능이 들어가지 않은 랜챗을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하면서 익명성을 악용한 또 다른 n번방 유사 범죄를 막으려는 조처다. 랜챗은 조건만남 등 성매매의 주요 통로로 사용됐다. 여가부 실태 조사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랜챗은 총 346개다. 이 중 300개는 본인 인증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범죄가 발생해도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청소년 대상 성매수 범죄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2018년 기준 조건만남의 91.4%는 랜챗, 메신저, SNS 등에서 이뤄졌다. 2013년에는 26.7%였는데 5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했다. 성매매 알선 범죄 또한 89.5%가 랜챗, 메신저, SNS 등에서 이뤄졌다.
여가부 청소년보호환경과는 “청소년이 이용할 수 있는 랜챗은 대화 중 불법행위를 발견하거나 성범죄 유인 등의 피해를 볼 경우 대화 저장 등 증거를 수집하고 신고할 수 있는 기능을 두게 하는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토록 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경찰은 범죄수법 진화에 따른 잠입수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신종범죄에 대응할 계획이다.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디지털 성범죄 방지대책을 추진했지만 정보통신기술 발전에 따른 가해수법의 고도화와 폐쇄적 해외 플랫폼 사용 등으로 한계가 노출됐다. 이에 따라 잠입수사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수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증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예정이다.
아동·청소년성착취물 제작, 영리 목적 판매, 알선행위에 대한 신고포상금제도도 병행한다. 앞서 텔레그램 성착취를 고발해온 여성단체 ReSET(리셋)의 사례를 보면 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때엔 경찰에 신고를 하기 어려웠다. 리셋이 피해자도, 가족도 아닌 제3자여서다. 이 때문에 신고를 반려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고포상금제도를 통해 국민 누구나 신고할 수 있는 유인체계를 구축해 사회적 감시를 강화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마련하면서 디지털 성범죄물 범위를 넓혔다. 변형카메라 이용 불법 촬영물, 당사자 동의 없이 유포되는 촬영물뿐만 아니라 협박, 강요, 온라인 그루밍 등에 의한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합성과 딥페이크 등 편집물이 포함된다. 법정형량도 올린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물 판매 행위의 처벌 하한선을 설정하고 SNS 등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광고에 대한 처벌도 신설한다. 성폭력을 준비하거나 모의만 해도 예비·음모죄로 처벌하고 범죄 수익을 환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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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