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훌훌 털고… 이젠 그쳐요, 피해 소녀들의 눈물

입력 2020-05-20 04:03

텔레그램에서 가학적 성착취가 자행돼 왔습니다. 그 실태를 보도한 국민일보의 ‘n번방 추적기’ 시리즈는 한국 사회에 여러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성착취를 주도했던 가해자들은 신상이 공개됐으며,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강화와 ‘n번방 방지법’ 제정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 마련과 함께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민일보는 가해자를 향한 분노에서 피해자와의 연대로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피해자들이 무너진 마음을 매만지고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n번방 밖으로’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 지원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은 여성가족부와 함께 현실적인 대책과 인식 개선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텔레그램 ‘박사방’을 운영했던 조주빈(25·구속)씨의 성착취 피해자로 추정되는 A양(16)은 앞선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고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A양은 지난해 피해 당시 중학생이었고 지금은 고등학생이 됐다. 피해를 본 지 1년이 지났지만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부모님이 알까봐, 친구들이 눈치챌까봐 전전긍긍하며 홀로 울었다. A양은 오히려 아무도 모르는 이 상황이 참 다행이라고 했다. 조씨가 검거된 후에도 경찰서 문턱을 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피해 사실을 말하기가 두려웠고 미성년자라 혼자서는 신고도, 치료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A양에게 “보호자 없이도 지원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던 날, “오늘은 푹 잤다”는 답장이 왔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시스템은 세계적인 모델로 꼽힌다.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운영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디성센터)다. 이곳에서 현재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 지원을 전담하고 있다. 텔레그램 ‘박사방’과 ‘n번방’ 피해자 다수가 디성센터를 통해 사회로 다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신분은 비밀에 부쳐지고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아도 긴급 삭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성착취물 삭제부터 개명까지 특별지원단에 직접 연계하면서 원스톱 서비스를 지원한다. 여성가족부 산하 특별지원단에는 전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위기센터, 해바라기센터가 참여하고 있다. 신속삭제지원단, 심층심리지원단, 상담·수사지원단, 법률지원단으로 세분화해 피해자를 전방위로 지원하고 있다.


디성센터의 주 업무는 디지털 성범죄의 선제적 조치인 성착취물 삭제 지원이다. 온라인에 퍼진 성착취 영상을 제거하면서 ‘잊힐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2018년 4월 출범한 디성센터의 실적 13만건 중 12만건은 삭제 서비스다. 지원 요청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여성긴급전화 1366의 디지털 성범죄 상담 건수는 지난 2월 227건에서 3월 330건으로 늘었고, 디성센터의 상담 및 삭제 건수는 35% 증가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디성센터)의 역할은 단순히 유포된 영상을 지우는 것만이 아니다. ‘n번방 사건’은 피해자의 신상 전부를 유포했기 때문에 피해자와 관련된 정보 일체를 다룬다. 유포된 신상 정보나 허위사실은 삭제지원이 가능하다. 편집물, 합성물, 가공물이 확보되면 삭제 및 모니터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신상 검색 기록이나 과거 인터넷 페이지 등도 찾아내 없앤다. 피해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라면 촬영물이 유포됐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피해자들이 성착취물 등을 삭제하려면 ‘디지털 장의사’로 불리는 민간업체를 이용해야 했다.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했고, 재유출 우려도 컸다. 이런 이유로 피해자들은 온라인에서 확산되는 성착취물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2018년 웹하드 카르텔 사건이 불거진 후 나라가 삭제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불법촬영물 추적 시스템 기술을 고도화하고 무료로 지원하고 있다.

김미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본부장은 “피해자가 URL, 검색어, 피해 촬영물만 지참하면 불법촬영물 추적 시스템에서 영상 DNA를 추출할 수 있다”며 “성착취물 원본과 서버에 저장된 동영상의 DNA 값을 비교해 불법촬영물이 게시된 URL을 특정해 삭제요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성년자일지라도 원한다면 긴급 삭제지원이 가능하다. ‘n번방 사건’처럼 자진해서 영상을 보냈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동·청소년의 피해촬영물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가해자는 처벌 대상이다. 김 본부장은 “미성년자는 부모나 지인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며 “하지만 초기 대응이 늦으면 늦을수록 피해가 반복되고 확대된다. 적극적인 지원과 예방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불법촬영물 탐지 시스템을 거치면 온라인에 퍼진 성착취 영상을 걸러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분 미만의 짧은 영상이라도 시스템에 넣으면 자동으로 영상 DNA를 추출할 수 있다. 약 10~30장의 이미지로 쪼갠 다음, 이를 토대로 유포된 영상을 찾아낸다. 촬영물이 없는 상황인데, 어느 사이트에 퍼졌는지 모르는 경우라도 삭제할 수 있다. 피해자가 유포 불안을 느끼는 구체적 원인이나 계기를 설명하면 이를 토대로 추적해나가는 기술을 갖고 있다. 유포 협박을 받았거나 촬영한 경험이 있는 경우 또는 촬영물을 송신한 경험이 있는 상황에 해당한다. 촬영물을 삭제해버린 경우라도 수사기관에서 증거확보를 위한 법적 구성요건이 갖춰진다면 복원할 수 있다. 김 본부장은 “민간업체를 통해 복원을 진행할 때는 피해촬영물에 대한 보안상 위험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삭제 절차도 간소화했다. 지금까지는 삭제 절차에만 24시간이 걸렸지만 대폭 줄이면서 확산을 막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달 23일 내놓은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에 따르면 피해자 신고가 없어도 사전 추적조사를 통해 선제 조치가 가능하다. 당초 피해 영상물 신고가 접수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심의를 하고 이후 인터넷 사업자에 삭제 요청을 하는 단계를 거쳤다. 지금은 일단 피해 영상물을 찾아낸 후 심의를 생략하고 인터넷 사업자에게 삭제를 요청할 수 있게 됐다. 심의는 삭제 이후로 늦춰진다.


성착취물 삭제·인력 확충 과제도

지금의 시스템 기술은 영상 DNA만 추출할 수 있다. 그래서 가해자들은 ‘합성 이미지는 괜찮다’라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합성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성착취 수법인 이른바 ‘지인능욕방’의 피해자도 디성센터에서 삭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수작업으로 진행하면서 유포된 성착취물을 삭제한다. 합성사진이나 원본사진, URL을 갖고 있다면 더 빠르다. 김 본부장은 “이미지도 DNA를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 계획”이라며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검색어를 통한 삭제도 가능하다. 센터 직원들이 삭제지원시스템을 기반으로 수작업까지 병행하며 음지 사이트까지 속속 들여다보고 있다.

디성센터의 인력난은 고질적 문제지만 최근 의뢰 건이 급격히 늘어나 더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삭제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17명이다. ‘2019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보고서’에 따르면 삭제 지원 건수는 2018년 월평균 3610건이었고, 이듬해 8213건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직원 1명 당 하루에 20건 정도를 처리한 셈이다. 삭제 요청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삭제 인력 충원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디성센터에서 피해 영상을 찾더라도 곧장 삭제할 수 없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성센터는 사이트 사업자에게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는 요청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반영하지 않으면 다시 방심위가 차단 조처를 한다.

김 본부장은 “인력이 부족한 것은 맞지만 업무에는 차질이 없다”며 “직원 모두가 피해자 지원에 매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이트 사업자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라며 “대다수는 디지털 성착취 근절에 동조할 뜻을 밝혀왔지만 아직 피해자 관점의 삭제 지원을 위해서는 결국 센터의 손이 미쳐야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피해 회복 위한 다각도 지원 체계 확충

디성센터는 삭제 지원뿐 아니라 신체·정신·재산상 피해 회복 지원을 위한 기관연계도 담당한다. 디성센터는 피해자가 원하면 상담을 위한 해바라기센터와 연계하는데 이곳에는 의사와 경찰, 변호사 등 전문 인력이 파견돼 있어 원스톱 지원이 가능하다.

피해자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가해자의 금전 미끼에 속아 무력해졌던 만큼 정부는 최대한의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신체 및 심리치료비와 더불어 생계비, 학자금 등을 지급하면서 사회로의 복귀를 독려하고 있다. 온라인에 주소가 유포돼 기존 주거지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임대주택을 저렴하게 임대하거나 거주지 이전비를 제공한다.

신변 보호에도 적극적이다. 보복 우려가 있는 피해자에게는 위치확인장치를 지급해 위급 시 곧장 경찰에게 알람이 가도록 하고, 피해자가 원하면 머무를 수 있는 검찰청 보호시설도 갖추고 있다.

개명과 주민등록번호 변경 등 법률적 지원도 함께한다. 현재 피해자의 80% 이상이 해당 절차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성범죄 피해자 가운데 가해자와 신상을 공유하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개명 등 법률 지원을 원했었다. 하지만 피해자의 신상이 모두 공개된 ‘n번방 사건’의 이례적인 특징을 고려해 ‘긴급처리 안건’으로 상정했다. 개명과 주민등록번호 변경은 통상 3주 이내에 처리가 가능하다. 재판 과정에서 조력도 얻을 수 있다.

※텔레그램 등 디지털 성착취나 불법촬영·유포·협박 피해자는 디성센터(02-735-8994) 또는 여성긴급전화 1366으로 연락하면 된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