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복병렬씨는 어디로 갔을까… ‘5·18 행불자’ 가족들 눈물

입력 2020-05-18 00:05
지난 14일 광주 서구 한 카페에서 만난 5·18 미등록 행방불명자 가족 방혜숙씨가 40년 동안 찾지 못한 시동생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가운데는 한 모임의 단체사진 속 복병렬씨(가운데 사진 원 가운데)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복씨에 대한 행방불명자 인정 요청에 대한 기각사유서. 광주=황윤태 기자, 방혜숙씨 제공

복병렬씨는 25세였던 1980년 5월 20일 이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가족은 자폐 증상이 있던 복씨가 계엄군의 진압이 한창이던 그날 광주 북구 풍향동 집을 나섰다가 계엄군과 시위대가 뒤섞인 현장으로 향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목격자는 먼 친척 아저씨가 유일하다. 겁에 질린 채 거리를 바라보던 아저씨는 복씨를 발견하고 집 앞 사거리까지 데려다 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복씨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후 40년이 지났지만 찾아야 할 대상은 아직 많다.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행방이 묘연해졌으나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인정 행방불명자’가 140여명이나 된다. 광주광역시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접수된 242건의 행방불명자 신고 중 절차를 통해 인정된 경우는 76건에 불과하다.

지난 14일 광주 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미인정 행방불명자 복씨의 형수 방혜숙(67)씨는 “(광주민주화운동) 다음 해 동사무소의 ‘장애인 실태조사’ 문서에 행방불명된 복씨가 버젓이 등록돼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동사무소에 달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하던 어머니 정모(91)씨는 그 뒤로 아들을 찾는데 일생을 쏟았다. 무뚝뚝한 성격의 정씨는 속내를 드러내거나 우는 일이 없었지만 1988년 당시 전두환씨가 은거하던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찾아가서는 “살인마 나오너라. 내 셋째를 내놓아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소원은 맏아들 복모(71)씨가 이어받게 됐다. 전남 여수로 터전을 옮긴 그와 방씨는 사업장 한쪽에 ‘행방불명자가족회 사무실’을 만들고 끈질기게 동생을 찾았다. 그러나 6번에 걸친 행방불명자 인정 절차에서 광주시와 정부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복씨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방씨는 “다른 가족들이 하나하나 인정을 받아 가족회를 떠날 때마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 매번 기각 판정을 받고 시청 사무실을 나설 때면 공무원들이 “아픈 동생 덕 보려고 한다”고 수군거려 속이 북받쳐 오를 때도 많았다고 한다. 5차 심의 당시에는 10명의 심사위원이 5대 5로 갈렸지만 규정에 따라 기각 처리됐다. 결국 지쳐버린 남편 복씨는 몇 년 전 ‘더 의상 의미가 없다’며 여태까지 모아왔던 자료를 모아 불에 태웠다. 남아 있는 자료는 몇 부의 기각결정문과 작은 사진뿐이다.

그래도 방씨가 남편까지 포기한 시동생 찾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시어머니 정씨 때문이다. 그는 “매년 음력 12월 2일이 되면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미역국은 먹었느냐’고 말한다”며 “음력 생일이 같은 나와 시동생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행방불명자 인정이라도 받아 마음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방씨는 조만간 남은 자료들을 모아 다시 행방불명자 가족 찾기를 신청할 예정이다.

세월이 흐르며 행방불명자 가족 찾기는 더 힘든 일이 됐다. 미인정 행방불명자 가족들은 지금까지 ‘확실한 증인과 증거를 갖고 오라’는 기각 결정문을 받아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 증인과 증거를 더 찾기는 쉽지 않다. 목격자들이 ‘너무 오래전 일’이라며 증언을 거부하거나 이미 사망해버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미인정 행방불명자들이 실종 당시 어린아이였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 사라졌다는 명백한 기록은 더 찾기 힘들어진다.

이들을 대변하는 단체도 2018년 해산했다. 남진현 전 5·18행방불명자가족회장은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내려간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증언센터 팀장도 “미인정 행방불명자 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정부의 미인정에 대한 분노,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라는 삼중고를 겪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5·18 가족찾기 사업이 한국전쟁 유해발굴 사업처럼 상설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남 전 회장은 “아직도 계엄군이 학살한 시신들이 어디에 암매장돼 있는지 찾지 못했다”면서 “가족 찾기 사업을 전국 어디에서나 상설화해 행방불명자를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