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모욕하는 5·18 왜곡·폄훼, 이젠 사라져야”

입력 2020-05-18 04:00 수정 2020-05-18 04:00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추모객들이 흰색 한복과 장갑을 낀 채 하얀 국화를 제단 위에 헌화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올해는 5·18 관련 기념행사들이 다수 취소됐다. 연합뉴스

#1. ‘무기고 털어 총 든 대학생들이 교도소를 6번 습격하고 정치사범 흉악범 간첩을 풀어 혼란을 야기한 게 민주화운동이냐?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같은 영화 몇 편 보고 팩트로 판단한다면…’(광주청년이라는 유튜버 ‘왕자’ 영상물)

#2. ‘1980년 5월 광주 무장폭동 당시 여자로 변장해 북한 특수군 600명을 총지휘한 리을설 인민군총사령관을 국민 여러분께 고발합니다.’(극우 보수논객 지만원 유튜브 방송)

5·18민주화운동이 벌써 40주년을 맞았는데도 그날의 역사적 의미와 진실을 폄훼하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5·18이 1989년 국회 청문회, 1995년 특별법 제정을 거쳐 199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됐음에도 이 같은 시도는 매년 수위를 높여 유튜브와 인터넷 게시판 등 온갖 디지털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5·18이 북한 특수부대 소행으로 발생한 무장난동이라는 ‘아니면 말고’ 식의 허언(虛言)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똬리를 튼 셈이다.

스스로를 보수논객이라 지칭하는 지만원씨는 2010년대 이후 각종 강연회와 집회,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인민군 원수 리을설이 홍길동처럼 펄펄 날아다니며 북한 특수군을 지휘해 5·18 광주사태를 일으켰다’고 주장해 왔다. 일명 ‘광수 시리즈’를 통해 광주에 내려온 북한군 고위직들이 시민을 선동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고 셀 수 없이 강변하기도 했다. 광수는 ‘광주의 수상한 사람들’ 또는 ‘광주 북한 특수군’의 줄임말이다. 그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란 책까지 펴냈다.

지씨는 대부분의 북한 핵심 인사들이 당시 광주에 내려와 무장활동을 했다는 엉뚱한 주장도 펴다가 지난해 대법원까지 간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하자 최근 슬며시 관련 글을 무더기 삭제했다. 이 과정에서 2억2000만원 넘는 배상금을 재판 원고인 5·18 당사자들에게 물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만원의 그림자’는 극우 성향 유튜버와 강경 보수 정치인들을 통해 더욱 짙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런 유튜버 중에는 5·18을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층과 2030세대까지 가세하는 실정이다.

젊은 극우 청년들은 ‘1인 방송’이 주류를 이룬 유튜브와 SNS 등 인터넷을 통해 가짜뉴스와 역사 폄훼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는 첨병 노릇을 하고 있다. 5·18기념재단이 지난해 5~9월 유튜브를 모니터링한 결과를 보면 충격적이다. 무려 100건 이상의 영상 콘텐츠가 5·18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18! 북한군이 전남도청 지하에서 지휘했다’(프리덤뉴스), ‘김정일, 내각 간부들 급파 작전 참관시켜’(참깨방송), ‘5·18 폭동 주범 북한에선 공화국 영웅, 남한에선 민주화 유공자?!! 탈북자의 충격 증언’(뉴스타운TV) 등은 여전히 구독자를 모으고 ‘좋아요’를 받으며 안방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재생된다.

2008년 1건에 불과했던 유튜브 5·18 왜곡 영상은 지난해 조사기간 동안 파악된 것만 98건으로 역대 최대 건수를 기록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5·18 왜곡 영상은 46개 채널 200여건에 달했다.

조회수가 10만건을 넘은 영상도 상당수다. 조사기간 10만명 이상이 조회한 왜곡 영상은 34건, 5만~10만명 이하 15건, 1만~5만명 이하 62건 등으로 나타났다.

운영 주체가 외국 소재 회사라 이런 영상은 단 한 건도 삭제되거나 차단되지 않는다. 방송심의위원회가 지난해 117건의 5·18 왜곡 영상에 대해 삭제·접속차단 결정을 내렸지만 유튜브 운영 주체 구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지씨 등 극우 인사에 대한 단죄도 한계 상황을 맞은 지 오래다. 인터넷에는 이들의 주장을 토대로 한 왜곡·폄훼가 떠돌지만 별다른 처벌이 어려운 배경이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유경남 학예연구사는 “5·18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계엄군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을 폭동에 동원된 폭도로 폄하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발생한 폭동이 무장봉기로 확대됐다는 논리가 극우세력 사이에 ‘정설’로 굳어졌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역사 폄훼가 잦아들지 않자 5·18의 진정한 의미를 담는 유튜버도 등장했다. 지난달 말 일부 왜곡 유튜브 영상과 똑같은 형식으로 이들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는 동영상이 그것이다. 이 영상을 제작한 광주 극락초등학교 백성동 교사는 “자극적·말초적 단순논리로 허언을 반복하는 왜곡 영상은 아직 역사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청소년기 학생들을 쉽게 세뇌시킬 수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조목조목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하는 동영상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희망적인 것은 국민 대다수가 ‘5·18 왜곡·폄훼 가짜뉴스’ 폐해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5·18기념재단이 최근 여론조사 전문 기관 ㈜현대리서치컨설팅에 의뢰해 전국 만19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인식 조사를 한 결과 5·18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처벌하는 법률 제정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79.8%나 됐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한 경우도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55.8%).

지역별로는 광주·전라 91.8%, 수도권 82.6%, 대전·충청 81.5%, 대구·경북 60.3% 순이었으며 연령별로는 학생 시절 5·18을 겪은 50대가 85.1%로 가장 높았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가짜뉴스를 접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도 69.2%나 됐다. 국민 대다수의 5·18 인식을 반영하듯 보수 정치권에서도 극우적 사고방식으로 역사 폄훼에 나서는 세력과는 단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5·18기념재단 ‘고백과 증언센터’ 박채웅 팀장은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면서도 “법적 소송과 유튜브 운영, 시민 참여와 연대를 통해 5·18 진실 찾기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