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5월 광주의 선교사들

입력 2020-05-16 04:02

1980년 5월 26일 밤, 총성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광주 양림동 사택 지하방엔 20여명이 불도 켜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시각 도청에서는 시민군이 죽음을 각오한 채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동화책 ‘제니의 다락방’(하늘마음)의 주인공 제니가 겪은 5월 광주의 마지막 모습이다. 계엄군은 이튿날인 27일 새벽 시민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제니는 찰스 베츠 헌틀리(한국명 허철선) 목사의 딸 제니퍼로 당시 만 10세였다. 70년 선교사 마을이 있던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헌틀리 목사는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일하며 부상당한 시민들을 숨겨주고 기록사진을 찍어 광주의 진실을 알린 인물이다.

책은 언니를 보러 대전에 다녀온 제니가 며칠 사이 달라진 광주의 풍경을 보며 시작한다. 시내에선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눈물 가스를 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잡혀가기 시작했다. 제니는 부모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락에 숨겨준 학생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다. 헌틀리 목사는 병원에 실려온 부상자들, 시내에서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아빠가 사택 지하 암실에서 현상한 사진들은 무섭고 끔찍했다. 이 사진들은 영화 ‘택시운전사’에 소개된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등을 통해 해외 언론에 보도된다.

1936년생인 헌틀리 선교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출신이다. 남부의 명문 듀크대학을 졸업한 그는 61년 목사 안수를 받고 65년 미국 남장로교 파송으로 한국에 왔다. 서울과 전남 순천에서 사역하다 69년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부임했다. 85년 미국으로 귀국한 그는 생전 “광주에 가고 싶다.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유족은 고인의 뜻에 따라 유골 일부를 2018년 5월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지에 안장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는 또 있다. 73년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부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아널드 피터슨 선교사다.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학자의 시각으로 5·18 상황을 꼼꼼히 기록하고 학살 현장과 헬기 사격 등을 증언했다. 그가 95년 공개한 200자 원고지 400장 분량의 증언은 외국인 선교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피터슨 선교사가 기록한 5월 20일 오전 8시 광주기독병원 예배 현장은 처절했다. 젊은이와 학생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던 한 의사는 “사랑하는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의 군인들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와 아이들을 죽입니까”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예배실이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침례신학대에서 교회사 교수로 강의하다 91년 미국으로 귀국한 그는 2015년 별세했다. 생전 유언을 통해 자신의 시신을 알츠하이머 연구를 위해 기증했다.

모레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뜻깊은 날을 소홀히 보내는 것 같아 아쉽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5월 광주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찬사를 받은 K방역의 근저에도 아시아 최고로 평가받는, 서구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5월 광주의 현장에서 신앙적 양심으로 진실을 알린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있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헌틀리 목사도 한국에서의 20년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가 회고록에 남긴 글이다.

“한국에서 보낸 20년을 되돌아보면 그 순간들이 정말 다 기억납니다.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가슴 깊은 대화를 나누고 한국 국민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던 마법과도 같은 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광주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눈물로 우리의 상처가 보듬어졌습니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