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

입력 2020-05-15 04:05

장국영과 장만옥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영화 ‘아비정전’의 도입부는 꽤 유명하다. “내 시계 좀 봐요. 오늘은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당신과 여기 같이 있고, 당신 덕분에 난 항상 이 순간을 기억하겠군요. 이제부터 우린 친구예요. 이건 당신이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죠.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이런 명대사도 그저 흘려들었다. 장국영의 잘생김이 더 인상적이던 시절이었다.

대학 신입생이 돼 015b의 ‘5월 12일’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는 날짜를 제목으로 정한 것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지만, 가사에 담긴 애틋함과 그리움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누군가와 헤어진 후에도 처음 만났던 날이 그토록 의미가 있는 것인지 신기했다. 하지만 연인과 만나거나 헤어진 날을 제목으로 하는 노래들은 이후에도 계속 등장했고, 그 사이 나도 사랑했던 사람과 만났던 날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날짜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란 것도 알았다.

인생에 별다른 사건이 없던 시절에는 막연히 기억과 시간이 반비례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다 잊어버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라는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상실 또는 이별 후에 덩그러니 남은 기억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잊어버리자고 단단히 결심해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비정전’의 대사처럼 ‘이미 지나간 과거’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은 1928년생이다. 그녀는 2017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세 살 때 기억이 유독 선명하다고 했다. 87년 전의 일이지만, 엄마를 만나기 위해 뛰어가던 행복한 순간을 구체적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전 일을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어떤 기억이 오래 지속되는 건 그만큼 자주 꺼내보고 다시 저장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그럴 듯하다. 아프고 슬픈 기억에도 똑같이 해당이 된다.

딸을 잃어버린 송길용씨의 이야기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과 전단지를 인쇄해 20년을 매일같이 거리에 나서는 아버지는 기적처럼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1999년 2월 13일에 딸이 실종된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딸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생이던 딸이 얼마나 착하고 발랄했는지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건강과 재산과 시간과 모든 것을 쏟았지만, 하루라도 한시라도 딸을 만날 수만 있다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여러 개인이 함께 겪은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이나 위안부 할머니의 아픔은 결코 쉽게 잊어서도 안 되고, 잊힐 수 없을 것이다. 그 일이 있기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는 없지만, 이미 엄연한 사실이 됐지만, 기억함으로써 계속 사랑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기에 디테일이 더해지거나 사라지고 변경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록으로 기억을 지키고, 기억으로부터 미래를 열어갈 힘을 갖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의 경우 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이산가족찾기 기록물 등이 등재돼 있다. 이러한 기록을 잘 지키고 후대에게 물려주어 우리의 기억이 모두의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고, 더 좋은 기억을 만드는 토대가 될 수 있기에 슬프고 부끄러운 기록도 의미가 있다.

잊지 못하는 기억들은 행복한 기억이든 아픈 기억이든 대부분 사랑했던 사람 또는 지키고 싶었던 것들에 관한 것이다. 이별이 상실과 상처로만 남지 않도록, 기억함으로써 계속 사랑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