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는 헝가리의 국보급 체스 선수였다. 1988년 4명만 뽑던 체스 국가대표팀에 동시에 발탁된 이들은 여성 체스 올림피아드에 출전해 자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상대는 12회 연속 1위 자리를 차지한 난공불락의 국가 소련이었다. 헝가리 국민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세 자매는 저마다 빛나는 성과를 올렸다. 맏이인 수전은 91년 남성들과 토너먼트 경기를 펼쳐 여성 최초로 그랜드마스터가 됐다. 막내인 유디트는 최연소(15세 5개월) 그랜드마스터에 등극했고, 둘째인 소피아는 그랜드마스터보다 한 단계 낮은 국제마스터가 되었다.
이쯤 되면 대중의 관심은 세 자매를 키운 부모의 교육 방식에 쏠렸을 게 불문가지다. 아버지 라슬로 폴가르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기존 교육 체제가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균적인 대중을 배출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녀들을 체스 선수로 키우기 위한 홈스쿨링에 몰두했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 탁구 강습을 마친 뒤엔 오전 10시부터 진종일 체스를 둬야 했다. 라슬로는 코치를 섭외했고 체스 잡지에서 기보 20만장을 오려 자녀들을 위한 나름의 체스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자녀들의 성공 덕분에 기세등등했던 라슬로는 이런 주장까지 늘어놓았다. “조기 전문화 방식을 1000명의 아이들에게 적용한다면, 암과 에이즈 같은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조기 교육의 환상
라슬로의 호언장담처럼 조기 교육이 성공의 요술봉처럼 여겨지는 게 현대의 통념이다. 서점가에는 남들보다 빨리 어떤 영역에 뛰어들면 그만큼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책이 차고 넘친다. 라슬로의 자녀들 케이스를 빼더라도 세상엔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가 대표적이다. 우즈의 아버지는 아들이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우즈는 네 살 때부터 아침 9시면 골프장에 갔다. 매일 여덟 시간씩 공을 쳤다. 우즈의 아버지는 아들이 넬슨 만델라보다 유명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지금 우즈가 누리는 명성을 생각한다면 엉터리 주장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라슬로의 자녀나 우즈의 사례에 반하는 케이스가 더 많다는 점이다.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은 반복해 쌓는 경험의 양이 언제나 학업 성취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성공의 지렛대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신간이다. 조기 교육은 체스나 골프 같은 일부 영역에서만 힘을 발휘한다. 저자는 이런 사실을 강조하면서 독자를 상대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선 다음과 같은 문장을 10초간 읽어보시라.
①덩어리로 20개의 단어는 패턴에 따라 개의 묶을 수 때 문장이 기억하기가 되어서 친숙한 사실상 훨씬 의미 있는 쉬워진다 있을 몇.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다음 문장을 읽은 뒤 뜻을 떠올려보자.
②20개의 단어는 친숙한 패턴에 따라 몇 개의 덩어리로 묶을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문장이 되어서 사실상 기억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여기서 ①번과 ②번은 동일한 단어로 이뤄졌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은 ②번이다. 이유는 “반복해서 접하는 정보들을 덩어리로 묶는” 메커니즘이 우리 뇌에 탑재돼 있어서다. 체스나 골프는 ②번 문장처럼 훈련을 반복하면 패턴 인식을 빨리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다. 저자는 ②번과 같은 영역을 “친절한(kind) 학습 환경”으로 규정한다.
문제는 이 세상의 많은 영역이 ①번처럼 해석이나 패턴 인식이 요령부득인, “사악한(wicked) 학습 환경”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이런 환경에서 필요한 것은 경험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단편적인 정보들을 깁고 엮어서 분류 체계까지 들여다보는 “과학적 안경”이다. 이 안경은 조기 교육을 통해서만은 얻을 수 없다.
저자는 조기 교육 신화를 결딴내는 무수한 사례들을 열거한다. “영국의 한 음악 학교 학생들을 조사했더니 비범한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보다 악기를 더 늦게 시작했다” “엘리트 선수들이 0~15세 때 자신이 향후 활약할 종목에 쏟은 시간은 준엘리트 선수들보다 적었다” “세 체급을 석권한 우크라이나 복싱 세계 챔피언은 어린 시절 전통춤을 배우느라 4년간 권투를 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같은 케이스들을 늘어놓은 뒤 이렇게 말한다. “조기 교육은 아이에게 좀 더 일찍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걸음마를 일찍 떼는 것이 인생에 중요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폭넓게 경험하라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저자인 데이비드 엡스타인(37)은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논픽션 작가다. 전작인 ‘스포츠 유전자’는 2013년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이 뽑은 ‘최고의 논픽션’에 선정됐었다. 그는 대학 시절엔 800m 달리기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이력의 소유자인 저자가 제시하는 인생의 성공 키워드는 ‘경험’이다. 조기 교육보다는 적성이 무엇인지 탐사하는 “샘플링 기간”의 유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최고 미덕은 주장의 뒷배가 돼주는 사례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책장 곳곳에는 경험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사례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가령 234개 출판사에서 나온 만화책들을 살펴봤더니, 만화가의 성패를 결정지은 요소는 경력이 아니라 “경험의 폭”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쌓은 창작자가 흥행작을 내놓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책에는 “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전문화가 점점 심해짐에 따라 실제로는 (전문가가 아닌) 외부인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말하면서 “경험의 폭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어쩌면 진부한 조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적지 않은 독자는 작은 위안이나 격려를 얻게 될 것이다. 저자는 “늦은 시작은 궁극적인 성공의 필수 요소”일 수도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젊은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오늘의 자신을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라. 사람은 저마다 발전 속도가 다르다. 그러니 누군가를 보면서 자신이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말기를.”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