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소개된 ‘채식하는 호랑이 바라’를 박혜진 평론가의 추천으로 찬찬히 읽었다. 딸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그림책을 접할 일이 많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그것을 몰랐을 때보다 알았을 때, 그것의 몰랐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은 그림책이 꼭 아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님을 안다. 되레 아이보다 어른이 읽어야 좋을 그림책도 많다. 대부분의 그림책이 그렇고, ‘채식하는 호랑이 바라’는 더욱 그렇다.
다른 호랑이와 조금 다른 바라의 고통과 보람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의 어려움과 뿌듯함일 테다. 바라는 호랑이지만 사냥이 무섭고 채식이 좋다. 집단이 지정하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면 배척받기 쉽다. 결국 바라는 검고 어두운 숲에 혼자 있게 된다. 혼자서 삶을 새롭게 시작한 바라는 문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에 대한 답은 결국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알아준들 내가 나 아닌 사람이 될 리 없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말처럼 쉽다면 더는 바랄 게 없겠지만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바라는 채식에서 답을 찾았지만, (책이 아닌) 현실에서의 (호랑이가 아닌) 사람은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 그림책에서 얻은 다소의 힌트와 용기는 그래서 소중하다.
정은 작가의 에세이 ‘커피와 담배’는 앞에서 얻은 힌트와 용기를 배가하는 책이다. 이 시국의 커피 그리고 담배라니…. 2019년 기준 한국의 커피 소비량은 세계 6위이며, 한 사람이 1년 동안 마시는 커피는 350잔이 넘고, 이는 세계 평균의 3배라고 한다. 과다한 카페인 섭취는 위와 장, 심장 등에 좋지 않지만 우리 주위에는 커피 없이 하루를 버티기 힘든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담배에 비하자면 커피 정도는 건강식품으로 쳐야 할 지경이다. 담배의 위해는 담뱃갑에 꽤나 자세히 인쇄되어 있으니 생략하기로 하자. 끔찍한 포장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담배를 찾는다. 인상된 가격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흡연율이 드라마틱하게 낮춰졌다는 통계는 없다.
‘커피와 담배’를 읽노라면 그런 공공의 일은 잠시 잊게 된다. 그리고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에 속절없이 빨려든다. 담배를 통해 실패한 로맨스의 기억과 3대째 이어진 가계(家系)의 습관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커피를 통해 한 시간 노동의 값을 가늠하고 어떤 값으로도 그 시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윽고 근사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싶어진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카페에서 대화 중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간 친구를 더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담배도 커피도 모두 내가 나이도록 돕는다. 나는 혼자일 때 가장 나이기 쉽다. 그럼에도 나는 홀로 있는 고립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커피와 담배는 혼자 있는 상태, 즉 ‘고립’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준다. 창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카페 단골손님이 과테말라만을 찾는 걸 알게 되어서가 아니다. “커피와 담배는 고립을 고독의 상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은 작가가 썼듯,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이 일으키는 이상한 매혹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매혹은 나를 나이게 도와줄 것이다. 내면의 바라봄은, 남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괜찮겠다는 용기를 줄 수도 있다.
‘커피와 담배’는 신생 출판사 ‘시간의 흐름’이 선보인 에세이 시리즈 ‘말들의 흐름’의 첫 번째 책이다. 흐름이 선사하는 연상대로, 시리즈는 끝말을 잇듯 단어에서 단어로 흐르며 이어진다. 다음 책은 금정연 작가의 ‘담배와 영화’이고 그다음 책은 정지돈 소설가의 ‘영화와 시’다. 진중하고 세련되며 날렵한 시작과 흐름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그것을 몰랐을 때보다 알았을 때, 우리는 더 즐겁다. 신선한 편집의 시리즈를 새로 알게 되었으니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이보다 더 바랄 게 없다. 커피와 담배처럼.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