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같은 자리. 어디를 봐도 공장 건물이 즐비하다. 굴뚝마다 공해 물질을 마구 내뿜는다. 서쪽 안양천 둑 건너 가난한 이들이 무허가 판자촌을 이루고 산다. 이곳은 장화 없이 살 수 없다. 퇴근 시간이면 매일 12시간씩 중노동한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한 15세 전후의 청소년들이다.
당시 영등포 경공업 지역에는 한영방직 동아염직 대한모직 대동모방 등 550여개 사업체와 4만여명의 공장 노동자가 있었다. 그곳 도림장로교회 산업전도회 선교보고에 따르면 ‘노동 조건이 극히 불량하며 노동자에게 로마 시대에나 행하던 복종과 맹종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전 근대적 기업경영과 노동 착취가 이뤄지던 시대였다.
산업전도는 그런 공장을 돌며 예배를 드리는 방식이었다. 기업주가 크리스천일 경우 그들의 협조를 얻어 예배를 드렸고, 성경공부를 시켰다. 한영방직처럼 아예 공장 안에 예배당을 세운 예도 있었다.
“맞교대 시간이면 예배 참석하라고 공장 문을 잠가요. 주말에는 18시간 근무로 돌아가던 시대였죠. 제가 ‘위장 취업’해 노동하면서 예배에 강제 참석하기도 했어요. 초청 설교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피곤함에 절은 우리들 귀에 들어올 리 없지요. 찬송을 떠나가게 부르지만, 진심이 아닌 거죠. 이게 아닌데…. 노동자를 위한 산업전도가 돼야 하는데….”(조지송 생전 구술)
조지송은 설교 방식의 예배로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그렇다고 크리스천 기업주의 신앙과 선의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상황 논리이긴 하나 그들은 일반 기업주들보다 교육과 복지에서 앞선 데가 있었다. 조지송은 구내식당 예배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드려지는 사외(社外) 예배를 권했다.
지금은 대형교회가 된 영은교회는 바로 이러한 공장 노동자들의 기도와 헌신이 녹아 시작된 공동체다. 강제 예배에서 벗어난 이들은 동아·대한·대동 등 회사 임원진과 함께 새마을교회(현 당일교회) 등에 모여 같은 성도로서 교제했다. 이들이 지역별 업종별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많은 교회가 개척됐다. 영은교회도 공장 선교에 나섰던 조지송 박조준 목사 등이 가마니를 깔고 드리는 예배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떡과 배움을 나눴다.
조지송은 예배, 기도회, 영어·한문·성경 공부, 좌담회, 교양강좌, 친목회, 음악감상 등의 프로그램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어느 날 초등학교 나온 16세 소녀 노동자가 안양천 변 공장에서 초과 밤샘 근무를 끝내고 산선 사무실(당산동)까지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왔어요. 오빠 학비를 대고 있었죠. ‘네 인생도 중요하다. 너를 위해서도 돈 모으거라’고 했어요. 라면 끓여주고 같이 울었습니다. 저는 18시간 일을 시키고도 초과 수당을 떼먹어 버스도 마음껏 못 타게 하는 회사에 분노가 치밀었어요. 이런 잔인한 짓 하도록 놔두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싶었죠.”(조지송 구술)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독재 권력의 탄압 속에서 산업선교에 힘쓴 조지송의 삶을 두고 ‘바보들의 행진’(조지송 자작시 제목)이라고 표현했다. 조지송은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동네 사람들이 ‘꼬마 목사’로 부를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형이 평양신학교 출신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피난 열차를 타고 월남한 그는 그날 영락교회에서 눈물의 보리밥으로 허기를 때웠다. 6·25전쟁 중 미군 부대 잡일에 이어 그곳 군목실에서 일했다. 그는 신학교 졸업 후 강원도 석탄 막장에서 탄가루에 범벅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성령체험을 했다. 까만 예수였다.
연보
·1951년 미군부대 잡역부·군목실서 일하게 됨
·1955년 오쇠리교회 개척 (현 서울 오쇠동)
·1961년 장신대 졸업 및 산업전도사연구회 참가
·1962년 탄광·철광·제철·방직 공장 현장 체험
·1964년 영등포산업전도 목사 부임
·1977년 1월 타임 ‘세계가 주목하는 올해의 인물’ 선정
·1983년 영등포산업선교회 사임
·1985년 청원(청주) 옥화리 ‘하나의 집’ 운영
·2009년 건강 악화로 성남 판교 이주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