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더웠던 재작년 여름,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땀 흘리며 계절을 난 뒤 이듬해 봄 부랴부랴 에어컨 구매에 나섰다. 한 가전업체 양판점을 찾아갔는데 가격 구조가 생소했다. 냉방, 제습 등 기본 기능만 있는 것과 공기청정 기능이 추가된 것, 인공지능 기능까지 더해진 것 등 여러 제품이 있었는데 제품별로 ‘혜택’이 달랐다.
혜택은 ‘캐시백’이나 ‘포인트’를 의미했다. 소비자가 일단 정가에 결제하면 나중에 일부를 현금이나 포인트로 돌려주는 것이다. 캐시백 시스템은 알아갈수록 교묘했다. 기본 기능이 있는 에어컨에는 혜택이 많지 않았고 추가 기능이 들어가면 캐시백이 많아졌다. 계산을 해보니 가장 저렴한 제품과 공기청정 기능이 들어간 제품 사이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았다. 선택은 공기청정 기능이 포함된 중간 등급 제품일 수밖에 없었다. 스탠드형과 벽걸이형이 결합된 이 제품의 정가는 300만원대 초반. 캐시백과 가전업체 포인트 등을 고려한 ‘실구매가’는 200만원대 중반이었다.
올해 다시 에어컨 구매의 계절이 돌아왔다. 인터넷에서 여러 구매 후기를 읽어보니 똑같은 ‘판매의 기술’로 에어컨이 팔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선택은 비슷해 보였다. 가장 저렴한 제품을 샀다는 사람보다 캐시백을 받기로 하고 중간 등급 제품을 샀다는 사람이 많았다. 가전업체는 왜 캐시백 방식의 판매 전략을 유지할까. 업체가 노린 건 ‘에어컨은 원래 비싼 제품’이라는 인식의 각인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구매 이후 ‘에어컨은 비싸다’는 느낌이 계속됐다. 가동 시간은 1년에 몇 달 되지도 않는데 가장 비싼 가전이 에어컨이다.
비싼 에어컨은 기기의 고효율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기를 덜 쓰는 에어컨’의 개발과 사용이 최근 추세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18년 ‘냉방의 미래(The Future of Cooling)’ 보고서에서 ‘고효율 에어컨’을 냉방 위기 시대의 대안으로 권고했다. 보고서는 2016년 전 세계에서 16억대인 에어컨이 2050년에는 56억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현재 에어컨 보급률이 8%이면서 28억명이 사는 가난하고 더운 나라에서 냉방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봤다. IEA는 그렇지만 에어컨을 사지 말라거나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소득 증가와 생활 수준 개선에 따른 에어컨 소유 욕구를 막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대신 정부가 에어컨 효율에 관한 표준을 정해 적은 양의 전기로 높은 냉방 효과를 낼 수 있는 에어컨 개발을 유도하라고 했다. ‘비싼 에어컨’ 지적에 가전업체는 ‘이러한 고효율화 추세를 따르고 있으며 이에 따른 가격 상승은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비싼 에어컨은 다른 문제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폭염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1995년 시카고의 폭염 사망자 700여명을 사회적으로 부검한 뒤 그 배경에 사회적 불평등이 있다는 내용의 책(‘폭염 사회’)을 냈다. 폭염으로 병이 생기거나 숨지는 사람은 주로 가난한 계층이다. 앞으로 여름이 더 더워질 텐데 에어컨이 계속 비싸지면 냉방에서 소외되는 계층이 늘어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효율이 높으면서도 비싸지 않은, 두 가지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에어컨이다. 그런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빌 게이츠는 가난한 나라에서 쓸 수 있도록 배설물을 물과 비료로 분해하는 화장실을 만들어 냈다. 지금의 원전보다 더 안전한 원전 모델도 개발했다. 이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선의의 기술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권기석 이슈&탐사2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