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텔레그램으로 몰려가면 어쩐담? ‘n번방 방지법 딜레마’

입력 2020-05-11 00:04

일명 ‘n번방 방지법’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자 정보기술(IT) 업계가 반발하고 있다. 불법 영상물을 모니터링하는 과정에서 ‘검열 논란’이 발생할 것이고, 이는 곧 제2의 ‘사이버 망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7일 전체회의를 열고 ‘n번방 사태’ 재발 방지 방안을 담은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법안에는 인터넷 사업자에 불법 촬영물 삭제·접속차단 등 유통방지 조치 의무와 기술적·관리적 조치 의무를 부과하는 조항이 담겼다. 개정안에 따르면 인터넷 사업자는 방송통신위원회에 매년 투명성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고, 국외 사업자도 ‘역외규정’에 따라 법 적용을 받아야 한다.

IT 업계는 법안 체계·자구 심사를 담당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개의를 앞두고 디지털 성범죄 방지에 사업자도 노력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개정안이 자칫 ‘사적 검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음란물 필터링 기술을 개발하는 등 자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최종 판단은 결국 책임자의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만큼 ‘대화방 감시’라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카카오톡 사용자들이 텔레그램 메신저로 옮겨갔던 ‘사이버 망명’ 사태가 재현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2014년 ‘카카오톡 감청 논란’과 2016년 테러방지법 처리를 앞두고 발생한 이 현상은 국내 플랫폼을 사용할 경우 대화 내용이 감시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하면서 유행했다. 이로 인해 카카오톡뿐만 아니라 네이버 라인, 네이트온 등 플랫폼 업계는 월간활성이용자(MAU) 수가 눈에 띄게 줄면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업계 관계자는 10일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법안이 통과될 경우 문제가 된 텔레그램으로 사용자가 다시 유입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안 내용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국내법을 바꾸더라도 해외 사업자에게 이를 집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번 ‘n번방 사태’에서도 한국 경찰이 수사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텔레그램 측은 협조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다. 법안에 역외규정·대리인 제도를 두지만 국내 법인이 없는 텔레그램을 비롯해 해외에 서버를 둔 업체들을 규제·감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에도 구글·페이스북의 국내 지사 대표가 의원들의 질의에 두루뭉술한 답변으로 일관하면서 답답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오히려 사법기관에 협조해온 국내 사업자에 규제 강도가 높아져 역차별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과방위에서 법안이 통과되자 “인터넷 사업자 책임 강화 방안은 국내 사업자 규제 강화 정책으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입장”이라고 비판했다. 여야는 마지막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오는 15일 이전 법안을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