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가자, 진실의 방으로

입력 2020-05-11 04:03

할머니들의 기억 때문에 단체를 만들고, 그 기억에 근거해 운동해온 사람들이 할머니의 기억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아이콘이나 다름없던 그 할머니가 갑자기 자신들을 비난하니까 “할머니 주변의 누군가에 의해 기억이 왜곡된 것 같다” “여당 비례대표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이 악의를 갖고 할머니를 부추겼다” “그걸 받아 적는 직업군이 문제”라고 말한다. 단체 이름이 정의기억연대인데, 여러 기억 중에서도 정의로운 것만 취급하는 모양이다.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표출한 분노가 100% 진실이고 저 단체가 나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정확한 진실은 나도 모른다. 다만 “(변덕 부리는 할머니의 주장을) 받아 적는 직업군이 문제”라는 말이 유감스럽다. ‘받아쓰기하지 말라’는 말은 요새 검찰 출입 기자 등을 향해서도 많이 나온다. 이게 ‘누군가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쓰기만 해서 사안을 왜곡시키지 말고 진짜 진실을 취재해 보도하라’는 요구인 건 안다. 하지만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건 ‘진짜 진실’이 아니라 ‘내가 믿는, 내 입맛에 맞는 진실’ 아닐까. 진짜 진실이 자신의 믿음을 무참히 깨부수고 ‘네가 틀렸어’라고 한다면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펄펄 뛸 것이 분명하다.

진짜 진실과 마주했을 때 사람들을 속된 말로 ‘깨갱 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는데, SF 작가 테드 창의 단편소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에서 그걸 찾았다. 가까운 미래, 많은 사람이 몸에 장착한 카메라로 자기 삶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는 ‘라이프로그’를 사용하고 있다. 방대한 양의 라이프로그에서 특정 순간을 찾고 싶을 때 재깍 검색해주는 ‘리멤’이라는 기술도 등장했다. ‘내가 아무개 결혼식 때 뭘 했더라’ 중얼거리면 망막 프로젝터를 통해 시야의 한구석에 해당 영상을 띄워 보여주는 식이다.

기자인 주인공은 이런 기술로 인해 인간의 생체적 기억이 디지털적 기억으로 대체되는 현상을 우려했다. 불완전하지만 여러 정서가 담긴 기억들로 축적되는 개인의 이야기가 차갑고 감동 없는 동영상으로 대체되는 것에 반발심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쓰려고 직접 리멤을 체험해 보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어린 딸을 홀로 키운 그는 자기 인생의 전환점으로 여겨온 장면을 확인 삼아 검색해본다. 아내의 가출로 오랫동안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가 반항적인 딸로부터 악의에 찬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순간으로 기억해온 장면이다. 그러나 딸의 라이프로그에서 영상을 찾아보니 해선 안 될 독한 말을 내뱉은 건 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저도 모르게 기억을 조작해 스스로를 영웅적인 싱글 파더로 미화해온 것이다.

부정확하고 왜곡되고 선별적인 기억에 근거한 ‘감정적 진실’을 ‘사실적 진실’이 무너뜨리는 순간을 겪고 깊이 참회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 중요한 건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여러 시점에서 틀리고 잔인했거나 위선적으로 행동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을 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에 관해 거의 모른다. 내가 리멤을 추천하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수치스러운 행위를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장래에 당신이 그런 행위를 되풀이하는 걸 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착각과 위선을 바로잡아 준다니 정말로 필요한 테크놀로지가 아닌가. 공상에 그치지 않고 빨리 개발되기를 바란다. ‘감정적 진실’만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 요즘 말로 ‘현타(현실자각타임)’를 선사할 수 있게.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