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자동응답기를 틀어놓는 것이 낫지 않겠나 생각했다. 라임펀드 환매중단 사태를 취재하면서 검찰에 관련한 질문을 할 때마다 돌아온 답이 늘 똑같았다. “검찰 형사사건 공개심의위원회가 결정한 공보 범위에서 벗어나 있어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도 새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니, 사건이 배당됐는지 정도는 확인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트집도 잡아보았다. 전화를 받은 인권감독관은 “원칙이 그러니, 제게 화낼 일이 아닙니다”라고 차분히 답했다.
기자 초년생 시절 검찰이 수사 중인 사안을 취재할 때는 다양한 관계자를 통한 ‘크로스 체킹’이 기본이요, 사안을 깊게 들여다보고 있을 수사팀에도 묻고 확인하는 것이 정석이라 배웠었다. 이를테면 ‘취재의 ABC’ 중 한쪽에 검찰 확인 단계가 있었던 셈인데,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을 계기로 법무부가 피의사실 공표를 엄격히 금지하면서 검찰은 더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됐다.
법무부가 피의자의 인권과 무죄 추정의 원칙을 내걸었으니 필자는 반성부터 하는 게 맞겠다. “취재한 사안은 수사팀에서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라는 담당 검사의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던 날에는 더 자신 있게 의혹 제기 기사를 썼다. 취재 진도가 영 시원찮을 때는 “뭘 봐야 합니까” 검사 옷자락을 부여잡던 게으른 날도 있었다. 검찰에 직접 확인 질문을 할 수 없게 된 지금은 다른 관계자들을 통한 외곽 취재를 더욱 탄탄히 하는 방법만 남았다. 제기하려는 의혹에 허점이 있는 건 아닌지, 논리적 오류는 없는지 꼼꼼히 보게 됐으니 피의사실 공표 금지 강화로 얻은 일말의 유익이라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겠다.
그래서 지난달 텔레그램 ‘박사방’ 수사 상황을 설명하겠다고 내려온 수사팀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다. ‘박사’ 조주빈(25)씨가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 수사 상황은 어떤지 상세히 언론에 알렸다. 피의자 인권과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 게 선택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수사를 지휘한 검사까지 기자실로 뛰어내려와 상세히 중간수사 결과를 브리핑하는 모습은 의아해 보였다. 물론 박사방 사건은 피의사실 공표로 얻을 공익이 침해될 피의자의 인권보다 더 크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조씨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그 누구도 토를 달기 쉽지는 않다.
다만 법무부의 원칙과 기준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은 조씨 사건을 제외하고는 지난해 말부터 검찰이 수사 중인 어떤 사안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청와대 하명수사·선거개입 사건, 조국 전 장관 수사 사건, 라임 사태와 같이 국민 다수의 관심이 집중된 중대한 사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의사실 공표 여부가 피의자 인권과 국민의 알권리라는 두 가치의 무게를 비교해 결정하는 것이라면 이토록 중대한 수사를 놓고서는 왜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겠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얻을 공익의 크기와 침해될 피의자 인권의 정도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측정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형사사건 공개심의위원회는 박사방 사건 브리핑을 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정확하지 않은 보도가 나오고 있어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이유도 들었다. 하지만 오보 방지라는 목적 역시 박사방만큼 중요한 다른 사안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할 부분이다.
결국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법무부와 검찰의 결정이 자의적이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리고 걱정이 든다. 앞으로도 법무부가 피의사실을 공표해도 된다고 결정하는 사안은 ‘모두가 응원하는 수사’가 될 것 같아서다. 돌려 말하면 정권이나 특정 진영에서 불쾌할 수 있는 수사는 가리고, 욕먹을 일 없는 수사만 선택적으로 알리게 될 것 같다는 얘기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맛에 좌우될 원칙으로는 검찰과 언론의 잘못된 수사·취재 관행을 바로잡겠다던 애초 목적도 성취할 수 없으리란 점을 법무부와 검찰이 깨닫길 바란다.
정현수 사회부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