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구실에서 코로나19가 유출됐다는 증거를 봤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4월 30일)
“중국 우한에 코로나19를 가져온 것은 미군일지도 모른다.”(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 3월 12일)
코로나19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의 세계 헤게모니 전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전염병 통제 과정에서 통치체제의 취약성을 노출한 두 나라는 이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다. 국제적 위신을 확보하기 위한 양측의 전쟁은 사실상 ‘신냉전’의 모습을 띠지만 어느 쪽도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새로운 국제 리더로 자리잡아도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 미국이 국제 리더 자리를 유지해도 되는지에 대한 회의감만 짙어지고 있다.
‘코로나 19 대전’ 美·中 어떻게 실패했나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쓴 팬데믹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잘못은 희석될 수 없다. 중국이 코로나19 창궐을 은폐하려다 전염병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는 게 국제적 상식이다.
지난해 12월 8일 중국 우한에서 첫 코로나19 의심 환자가 발생하고 이듬해 1월 23일 우한 봉쇄령이 내려지기까지 약 7주 동안 중국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문화는 바이러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억눌렀다.
결정적 순간은 1월 1일이었다. 당시 우한 중심병원의 안과의사 리원량을 비롯해 8명의 의사들은 코로나19 확산 가능성을 경고했다. 국가 전염병 조기 경보 시스템이 의사들에게 요구하는 대로 행동한 것이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공안 당국의 처벌이었다. 유언비어를 퍼트려 사회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게 이유였다. 진실은 그렇게 무력화됐다.
중국 당국이 대중들에게 바이러스 창궐을 경고하는 분명한 조처를 취하지 않자 상하이 공공위생 임상센터 연구진은 같은 달 11일 코로나19의 게놈(유전체) 서열을 전 세계에 공개했지만 후속 대응은 없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경제 활성화를 위해 춘제 분위기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당국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1월 말 춘제 대명절을 앞두고 500만명의 우한 시민들이 우한을 떠나 중국 각지로 흩어졌다. 공중보건 위기에 대한 대응보다 중국 정부의 정치·경제적 고려가 앞서면서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번지게 됐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를 과소평가하다 최대 피해국이 됐다. 이 과정에서 민간의료 의존도가 높은 미국 의료 시스템의 취약성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트럼프 리스크’는 사태를 악화시켰다. 미국 정보 당국과 보건 당국은 코로나19가 중국을 휩쓸고 있던 올해 초부터 트럼프 대통령에게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이 같은 경고를 외면했다. 올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경제가 악화되면 자신의 재선 가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판단도 개입됐다.
높은 의료 비용 탓에 진단검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난 2월 미국 질병통제센터(CDC)가 각 주와 지방 공공보건 연구소에 배포한 진단키트가 불량으로 판명돼 전량 수거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6주의 시간이 허비됐다. 초기 방역 공백의 대가는 뼈아팠다. 미국은 가장 많은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한 국가라는 오명을 얻었다.
‘포스트 코로나’ G2 자리가 흔들린다
코로나19 대응에서 큰 상처를 입은 두 강국은 사태의 책임을 외부 적으로 돌리는 손쉬운 전략을 선택했다. 미국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직접 나서서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의 바이러스연구소에서 시작됐다는 증거를 봤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 입에서 중국 측에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코로나 팬데믹의 발원지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려 애쓰는 중국 당국은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유튜버의 주장까지 퍼나르며 지난해 10월 우한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출전한 미 군무원 여성이 중국에 최초로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여론전을 펼쳤다.
미·중 양국 정부는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를 공공재로 만들기 위한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에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 리더로서 모범적인 방역 모델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두 강대국이 백신이라도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선점해 국제 관계상 우위에 서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프랑스 파리 소재 싱크탱크 몽테뉴연구소의 도미니크 모이시 선임고문은 지난달 23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거의 모든 사회의 장점과 단점을 까발렸다”며 “그중에서도 미국의 대응은 단순히 나쁜 정도가 아니라 독보적으로 나빴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미국은 국제적 지도력은커녕 자국민 보호에도 실패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돼온 ‘미국 예외주의’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미국의 대안으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코로나19에서 비롯된 세계의 반중 정서는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이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극심한 전체주의적 조치를 취하는 동안 미국은 바이러스를 장기간 방치했다”며 “이들은 양극단으로, 둘 중 어느 것도 유럽의 모델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 외교전문 매체 포린폴리시(FP)는 지난달 27일 “아시아가 새로운 미래지만, 중국은 아니다’는 기사를 통해 “코로나19 사태는 공중보건, 기후변화 등 전 지구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데 더 적합한 통치 모델을 찾기 위한 국가 간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대만 등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위기 상황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 자유를 일정 부분 양보한 국가들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모범적 통치 모델로 꼽았다.
FP는 “이들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는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이는 집단규율, 권위에의 복종으로 대표되는 중국적 가치와는 다르다”고 분석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