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위기와 기회

입력 2020-05-08 04:01

대형마트로 향하던 걸음을 틀었다. 뒤쪽으로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몇 년 동안 지냈던 동네인데도 여러 번 두리번거려야 했다. 시선 끝에 못 보던 카페와 분식집이 보였다. 걸음은 작은 마트로 이어졌다. 오가는 길에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선 것은 처음이었다. 다소 협소했지만 어지간한 생필품은 다 갖추고 있었다. 대형마트에서 찾을 수 없었던 물건도 있어 미소가 번졌다. 집과 가깝고 조금만 움직여도 필요한 물건을 고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대형마트에선 얼마간 버릴 것을 짐작하면서도 대량으로 담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잦았는데 여기선 낱개로 살 수 있다는 것도 반가웠다.

밖으로 나와 미리 봐둔 빵집에 들렀다. 겉보기에는 낡았지만 안쪽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한자리에 십수 년 동안 있었다는데 번번이 무심코 지나는 바람에 놓쳤던 빵집이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빵이 많아 빵을 담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가격이나 결제방식처럼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안부까지 전하는 목소리는 오랜 만에 느껴보는 온기였다. 지자체에서 지원해준 재난긴급생활비 덕분이었다.

최근 정부에서도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일정을 발표했다. 이번 주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해 생활 속 거리두기도 시작됐다. 이에 따라 한산했던 거리가 조금씩 북적이는 분위기다. 그 분위기가 골목 구석구석까지 이어지고 있다.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을 서성이는 사람도 늘었다. 지원금이 지역 화폐로 지급돼 사용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전하는 이도 있지만 소상공인을 도우려는 목적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것으로 소규모 상점을 찾는 발길이 꾸준히 늘어나길 기대하는 상인들이 많다.

이 과정에서 이제껏 외면해 왔던 가게들이 품은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소비가 위축돼 위기에 놓였지만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쉽게 드러났다. 한 공간에서 다양한 물건을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이나 주차 문제처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도 많았다. 순간 오래전 세탁소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세탁소는 근처에 24시간 빨래방이 들어서면서 한때 위기를 맞았다. 손님들은 저렴하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빨래방으로 몰렸다. 아버지는 작고 허름한 세탁소만의 강점을 고민했다. 섬세한 손세탁과 오랜 시간 노하우를 축적한 수선을 떠올렸지만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중국집 메뉴판에서 본 문구를 중얼거렸다.

“한 번 떠난 단골이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십 년이 걸린다.” 목소리는 ‘십 년’을 발음할 때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곧 기회가 찾아왔다. 빨래방이 며칠간 문을 닫았을 때 사람들이 다시 세탁소를 찾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무척 애썼다. 지원금을 받은 아버지는 그 시절을 떠올렸다.

지원금을 둘러싼 혼란도 있다고 한다. 기관에 따라 명칭과 신청방식이 달라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사용처를 일일이 확인해봐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세대주만 신청할 수 있다 보니 가족의 다양한 사정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에 대한 공감과 소상공인에게 도움을 줄 거라는 입장에는 이견이 없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사람들의 걸음이 작은 가게로 이어질 거란 기대도 여전하다. 기대가 현실로 이어지려면 이제껏 접할 기회가 없었던 장점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불편함에 귀 기울이고 개선하려는 방향도 필요하겠다.

지역 화폐 사용 기간 동안 부지런히 동네를 둘러볼 계획이다. 요즘 가까운 자리에서 따뜻한 가게를 만나 공유하는 일이 무척 즐겁다. 벌써 몇 군데는 지역 화폐를 다 써도 계속 찾으리라 다짐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골목길에서 비슷한 다짐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전석순 소설가